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에서 강의후에 찰칵.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한 IL단체인 ‘중증장애인독립생활연대’에서 ‘독립운동’(Independent Movement)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강연을 하는 전신마비장애인 김종배씨를 만났다.

그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공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지난 1985년 친구집에 놀러갔다가 남의 집이고 익숙치 않은 관계로 2층 베란다에서 발을 잘못 디뎌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때 나이 만 24세.

한창 공부할 나이이고 혈기왕성한 때라 쇼크가 아주 컸다. 당시 그를 바라보는 부모님은 항상 울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병원 창문에서 뛰어 내린다고 할 정도로 아들의 사고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다.

신경 정신과에서 수술 후 곧 퇴원을 했는데, 그때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장애인을 위한 재활이나 재활 센터가 특별히 없었다. 병원에 오래 있는다고 별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어서 퇴원해 여기저기 알아보기로 했다.

어떻게든 고쳐보겠다고 하는 부모님의 마음. 누가 알까. 이것저것 침도 맞아보고 약도 지어 먹어보고 해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사고 후 5년을 바깥출입도 하지 않은 채 거의 집에서 지냈다. 그 5년이라는 세월을 정말 많이 힘들게 보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그 닫혀진 마음이 조금씩 열렸고 바뀌었다.

"물론 많이 불편했지요. 하지만 세상을 원망해 보거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내가 여태껏 잘못 살아 왔구나. 그래 다시 열심히 살아보자고 생각 했어요.”

열심히 강의를 듣는 IL회원들.

1990년에 국내에 처음으로 일반인들에게 PC가 보급이 되었다. PC가 일반인에게 보급되기 전부터 학교에서 컴퓨터를 사용했던 그에게 번쩍이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문서를 작성하고 회지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짜서 활동 할 수 있겠구나”라는 자심감에 KAIST때의 전공을 살려 기계 자동화 시스템 소프트웨어 등의 개발에 나서 1991~1994년 중소기업에서 개발업무를 맡아 일을 했다.

1995년 본격적으로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그는 “그래, 이제 이런 세상도 오는구나, PC는 새로운 기회다. 중도장애를 입은 장애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극복할 수 있게 직업재활을 통한 장애인식을 바로하게 하자”라는 생각에 1996년 장애인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국내 최초의 홈페이지 '한국척수장애인사이버센터'를 만들어 운영했다.

또한 1997년부터는 무료 장애인정보화교육센터도 운영해서 지금까지 수백 명의 장애인들이 이곳에서 정보화교육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컴퓨터를 배우는 장애인들이 많이 힘들어했는데, 배우고 나서 나중에 스스로 데이터를 만들고 입력하면서 다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가질 때가 제일 보람을 느꼈습니다.”

올해로 박사과정을 끝낸 그는 피츠버그대학에서 다음 학기부터 재할공학연구교수로 일하게 됐다.

한국에 자주 오지만, 특히 이번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왔다.

첫번째는 미니홈피를 제공하고 있는 ‘싸이월드’에서 홈페이지를 만들 때 사용하는 배경화면을 ‘그리믹스’라는 곳을 통해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믹스’는 ‘그림’과 ‘그래픽'을 조합해서 만든 이름.

싸이월드의 아트갤러리 안에 ‘그리믹스’라는 곳을 통해 척수장애인화가 4명(김형희,탁용준,방우영,김영빈)이 그림을 제공하고 그리믹스의 디자이너가 다시 그것을 배경화면으로 디자인해 스킨으로 제작, 일반 홈피를 꾸미려는 사람들에게 판매를 하고 있다. 여기서 판매금액의 10%를 마비장애인들의 신경재생 연구기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두번째는‘일다신경재생재단’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다’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앉은뱅이에게 ‘일어나라’해서 일어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지난 목요일 한국에 들어와 바쁜 일정 중에도 인터뷰에 응해준 김종배씨는 끝으로 ‘한국의 장애인인식과 미국의 장애인인식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장애인들이 공부를 하던 어떤 일을 할 때 장애인 스스로가 장애 때문에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중증장애를 갖더라도 항상 옆에있어 주는 간병인이라던가 수업을 들어야 할 때 옆에 함께 있어주는 보조자들이 있어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에 반해 한국에서는 장애인이 뭔가 혼자하려고할 때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으로 취급을 받는다.

때문에 미국에서 10가지 중 1가지를 불편하다고 할 때 한국에서는 6~7가지가 불편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복지가 잘 되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전반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개선되어야만 한국의 장애인 복지도 바뀔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장애인 스스로도 당당해져야 하며 생각도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이다.”

강의에 참석한 IL 당사자 회원들.

사람 만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김진희씨는 지난 97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사고를 당하기전 280명의 원생을 둔 미술학원 원장이기도 했던 필자는 이제 영세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에게 재활보조기구나 의료기를 무료로 보급하고 있으며 장애인생활시설에 자원봉사로 또 '지구촌나눔운동'의 홍보이사로 훨씬 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방송작가로 또 KBS 제3라디오에 패널로 직접 출연해 장애인계에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음식을 아주 재미있고 맛있게 요리를 할 줄 아는 방년 36살 처녀인 그녀는 장애인 재활보조기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이트 deco를 운영하고 있다. ■ deco 홈페이지 http://www.uk-or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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