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연씨.

문득, 어느 장애인 선배가 한말이 생각난다. “어휴, 요즘 장판은 너무 좁아. 좀 지나고 나면 다 안다니까….”

순진하게도 그때는 ‘장판’이 뭔지 잘 몰랐다. 그저 시골에서 열리는 5일장이나 3일장쯤으로만 생각을 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말뜻을 서서히 알게 됐다.

현재 등록한 장애인들은 약 170만 명. 등록하지 않은 장애인까지 합치면 족히 500만 명은 넘을 것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스쳐지나가듯 만나게 될지 모르는 친구들이자 선후배들이다.

유이연.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초록 모자에 초록 옷을 입고 나왔다. 내 스스로도 한 ‘미’(美)적 감각을 한다고 생각 했었는데, 첫 모습을 보는 순간 “엉. 이사람 감각이 장난 아닌데…”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나이는 29살. 본명은 박찬건. 왜 이름이 유이연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말한다. “장애를 입고 새롭게 얻은 삶이기 때문에 가족들이 이렇게 불러요. 오래 살라는 뜻도 있고…. 어렸을 때부터 꿈이 방송인, 연극인이 되는 거라 새롭게 얻은 삶이기에 이제부터라도 그 꿈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이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그의 장애는 ‘불완전 마비’다. 구체적으로 자세히 말하면 경추손상 2급의 불완전 마비 지체2급 장애인이다. 뭔, 병명이 그리 기냐고 물을 것이다.

흔히들 ‘경추손상’이라고 하면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줄 알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카페문을 열고 뚜벅 뚜벅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이연씨. 저는 휠체어를 타고 오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일부러 경사로가 되어있는 장소로 자리를 잡은 것인데. 와! 잘 걷네요. 이렇게 걷기까지 얼마나 연습했어요”라고 했더니, 피식 웃으며 “어떻게든 살아야하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 재활에만 신경썼어요.”

에고, 그 말을 듣는 필자의 눈에서도 눈물이 핑 돈다. 죽을 힘을 다해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자기 자신과 싸웠을까. 그의 모습이 상상이 간다.

연극하는 친구들과 함께.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독 장난꾸러기에다 밝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매사에 힘든 일이 있어도 “모두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만큼 낙천적으로 헤쳐 나가는 성격이었다.

그러다 1990년 중학교 2학년 즈음. 친구들과 동네 놀이터에서 농구를 하며 놀다가 고개를 살짝 들었는데, 목에서부터 양팔 끝까지 ‘찌릿’하는 증상이 왔다. 그땐 그냥 단순히 삐끗했나 보다 하고 생각 했었는데, 중3, 고1, 고2를 지나면서 한손가락 감각이 둔해지더니 그 다음은 두 손가락, 세 손가락, 손 전체로….

그 후에는 감각이 둔해짐과 함께 마비증상에 다리를 절뚝거리게 되었다. 숱하게 넘어지고 다치면서도 늘 웃음은 잃지 않았다. 좋다는 병원은 다 돌아다니며 검사를 했지만 병명은 나오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절망에 빠져있던 가족들에게 친척의 소개로 다른 병원을 소개받고 그 병원에서 많은 검사를 거쳐 원인을 알아냈다 하지만 이미 그땐 온몸이 마비되고 손가락하나 꿈적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병명을 알 때 까지만 해도 웃음을 잃지 않았는데 수술하기 전 수술각서에 서명을 하면서 웃음을 잃어버렸다. 그 후 중환자실을 거쳐 입원실로 올라온 후 힘겨운 재활훈련은 시작되었고, 수술 후유증인지 모든 것이 흔들리고, 대소변 조절이 안 되어, 실수도 많이 했다. 그렇게 병원에서 바라본 바깥세상은 그에게 또 다른 세상이었다.

퇴원 후. 남들 눈을 의식해서인지 바깥출입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다 몸이 조금씩 좋아지면서 이젠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1997년에 국립재활원에 들어가 컴퓨터과정을 배우며 사회적응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 후 경기도 광주 삼육직업학교도 입학해 정보처리 자격증과 컴퓨터 프로그램언어 자격증들을 취득했다.

그 후 취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2003년에 전자제어장치를 생산·수출하는 중소기업에 사무직으로 입사해서 2년 정도 근무하며 총무관리직까지 올랐다. 하지만, ‘이게 아니다’라는 생각에 어렵게 얻은 직장을 (어린시절 꿈인 가수가 되고 싶어서. 노래가 하고 싶어서) 그만두었다.

여자친구와.

“나도 잘 할 수 있는데, 열심히 할 수 있는데”라는 꿈틀대는 갈망을 그냥 가슴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를 유심히 보며 혼자 연기연습을 하기도 하고, 라디오 DJ 흉내도 내보고, 성우 흉내도 내보며 방송에 대한 갈망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지난해 2004년 ‘KBS 장애인 방송인 선발대회’ 공고를 보고 접수를 하고, 예선통과를 거쳐 본선에 나갔다. 안타깝게도 입상은 못했지만, 그런 자리가 생겨나기 시작함에 그는 잊었던 꿈을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런 계기로 애니메이션 성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밤이 늦어도 녹음이 있다면 바로 달려가곤 했다.

또 EBS 방송에 출연해 팝페라 가수 마리아와 팝페라 공연을 2차례나 하기도 했고, 장애차별금지 퍼포먼스 공연을 비장애인들과 함께 여러 차례 갖기도 했다. 여기서,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둘의 모습을 보면 참 예쁘다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생김새 말투, 마음 씀씀이 등…. 한마디로 한 쌍의 닭살커플이다. 결혼도 생각 하고 있지만 여자친구 부모님이 걱정이다. 과연 그를 허락 할지 조심스럽다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둘만의 예쁜 추억들을 만들고 싶어서 얼마 전에 치러졌던 한 장애인 웨딩 패션쇼 무대에 함께 서기도 했다.

“저는 무대가 좋습니다. 무대만 있으면 어디든 오르고 싶습니다. 노래와 음악이 좋아 가수를 그리며 살아왔고 이젠 연기, MC, 성우 등 다양한 분야에 더 큰 열정과 욕심이 생겼습니다. 앞으로 어디든 저를 불러주는 무대가 있으면 갈 것이고, 저 또한 더 많은 노력과 연습으로 다져서 무대위에서 내뿜겠습니다."

현재 그는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국립극장 별오름 소극장에 오를 ‘코가서스의 백묵원’이라는 연극을 준비 중에 있다. 이 연극을 마치면 장애를 가진 몇몇 친구와 퍼포먼스 팀을 만들어 예술활동을 펼쳐 나갈 계획까지 갖고 있다.

이야기하는 내내 그의 밝고 적극적인 모습과 연극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모습에서 무대는 그에게 있어 살아가는 이유를 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는 것 같다. 분명 그의 이런 열정이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믿으며…. 곧 올려질 연극 대박나기를 기원한다.

사람 만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칼럼리스트 김진희씨는 지난 97년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사고를 당하기전 280명의 원생을 둔 미술학원 원장이기도 했던 필자는 이제 영세장애인이나 독거노인들에게 재활보조기구나 의료기를 무료로 보급하고 있으며 장애인생활시설에 자원봉사로 또 '지구촌나눔운동'의 홍보이사로 훨씬 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현재 방송작가로 또 KBS 제3라디오에 패널로 직접 출연해 장애인계에는 알려진 인물이다. 특히 음식을 아주 재미있고 맛있게 요리를 할 줄 아는 방년 36살 처녀인 그녀는 장애인 재활보조기구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해주는 사이트 deco를 운영하고 있다. ■ deco 홈페이지 http://www.uk-orth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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