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팰리스]는 장애인 성을 밖으로 도출시키기 위해 우리 안의 다양한 시선을 묶어내고 다시 정리하는 필자로서 특히 눈여겨볼 수밖에 없는 영화다. 아울러 필자는 [핑크 팰리스]를 기획하고 구성하는 등 초기 작업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서 극장에 상영된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이 남 다른 감회로 다가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피소드도 적지 않았다. 가능한 많은 장애인을 만나기 위해서 제작진과 함께 전국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 다닌 시절. 그리고 장애인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그들의 입을 통해서 직접적이고 진솔한 성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장애인 당사자로서 많은 애를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또한 스텝으로 참여한 한 중증 장애여성은 잦은 이동이 많아서 이동문제로 함께 하지 못할때에는 소외감마저 느꼈다는 뒷이야기를 들으면서 의미 있는 일이라도 모두 다 함께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설레임/b>

[핑크 팰리스]의 상영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며, 극장 안을 들어설 때는 왠지 모를 설레임까지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반드시 풀어내야 할 장애인의 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는 점과 비록 함께 끝까지 함께 할 수 없었지만 초기 작업에 열정을 가지고 함께 참여 했던 기억에서 오는 기대가 아니었을까.

문득 다시 한 번 되돌아간 그 시절. ‘성별 및 장애 유형과 정도를 골고루 배려하여 인터뷰를 하고, 이 속에 장애인의 삶을 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필자의 큰 목소리와 진지함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렇듯,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로의 발레타인 소극장을 찾은 필자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고민하여 엘리베이트가 설치된 건물에 극장을 잡으려 했던 관계자들의 노력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몇 개의 계단을 넘어서야 엘리베이트를 탈 수 있어 경사로 없는 것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드디어 시작된 다큐멘터리

필자가 성에 대해서 인터뷰한 내용을 읽고 [핑크 팰리스] 기획안을 가지고 처음 방문했던 서 감독은 진지하게 성에 대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나는 섹스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그러나 나도 섹스에 대해서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내 자신의 섹스에서 장애가 있지 않는가 한다. 함께 걸음이란 잡지에서 장애인의 성 관련된 기사를 보면서 어딘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며, 영화를 기획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애인들의 당당한 성적 이야기들은 보는 이와 함께 융화되어 저절로 즐거웠다. 그들의 유머와 때로는 뼈가 아릴 정도로 힘겨운 생활 이야기가 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내려갈 때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한 제작진의 고민이 엿보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후반으로 가면서, 점점 지루해지고, 한편 답답함이 몰려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내가 자유로운 이동을 할 수 있는 몸이었다면, 몇 번이나 극장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감독의 시선

과연 어떤 무엇이 내 숨통을 막았던 것일까? 집에 돌아오는 내내 호흡을 가다듬으며 찾은 결론은 ‘영화의 시선’이었다. 이 영화의 시선은 끝내 ‘감독의 시선’이었고, 이렇게 드러난 감독 시선의 정체는 보편적인 한국 남성의 사고방식에 있었다. 대단히 남성 중심적이고, 이성애 중심이면서 성기삽입 중심인 사고말이다.

이처럼 필자의 숨을 막아버리고 답답하게 만든 감독의 시선은 형식적으로는 장애인의 성을 표현했지만, 결국 그 안에 정제되지 않은 자신의 관념과 더불어 한국 남성들이 갖는 보편적 시선이 갖는 성이야기를 채워 넣는 것이 돼버렸다. 영화는 그 특성상 철저하게 감독의 철학과 정신이 반영되기 때문. 반면, 나름대로 노력한 다른 스텝들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으나, 흔적일 뿐 미비했다.

물론, 이런 시선을 드러내는 것 자체는 용기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누가 봐도 비판의 지점이 될 수 있지만 일단 과감히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용기가 단순히 ‘장애인에게도 성적 욕구가 있어요.’를 밝히는 데 머문다면 무성의 존재로 낙인찍힌 장애인의 성 정체성을 또 다시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대안을 깊게 고민하고 사회적 책임감을 절실히 느끼게 만드는 작업이 수행되어야 했었다.

가슴이 답답해지다

가슴이 답답했던 또 다른 이유는 영화의 후반부에서 차마 웃으면서 넘길 수 없는 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최동수 씨가 다시 한 번 성매매 업소를 찾게 되는 과정은 감독과 PD의 유도하는 듯한 의도가 깔려있다는 인상이 두꺼웠다. 혹시 착각일까? 아니면 나만의 느낌일까? 영화작업을 전문적으로 하는 분에게 의견을 물어보았다.

“핑크 팰리스는 장애인의 성욕을 드러낸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장애인과 관련된 영화인 오아시스나 말아톤의 경우 장애인계에서는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졌지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이 영화를 통해서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졌으며,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장애인 관련 영화들은 장애인계의 비판 속에서도 그런 긍정적인 효과가 있었으나, 핑크 팰리스는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한 면이 있다.

또 최동수 씨가 성매매를 이용하는 과정은 상당히 인위적이고 유도성이 강하다. 그런 면에서 최동수 씨의 이야기는 함께걸음에 났던 기사의 재연에 불과하다. 대안 제시가 없이 인터뷰를 통해서 끌어내는 단순한 방식과 구성 또한 저급하다고 생각한다. 실제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시나리오 전문 구성작가들은 이 두 가지를 차갑게 비판했다.”

함께 관람했던 학생들 역시 차마 감독의 면전에서 비판을 하지 못했다고 전해주기도 하였다. 필자는 이런 강한 비판의 목소리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제작진에게 부탁한다

최동수 씨가 이동하는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에 봉착했던 상황은 제작의 윤리에 대한 논란을 제공하였고, 가장 아쉬운 점은 앞에서 소중하게 이야기되었던 다양한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최동수 씨에게 포커스가 맞춰지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묻어지는 상황도 그렇다. 이 어쩔 수 없는 남성중심의 시선은 장애인의 성 향유가 아직 멀리 있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핑크 팰리스]에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면, 어두운 곳에 소외된 채 묻혀진 장애인의 성을 다루었다는 점에 있다. 이 작업을 통해서 감독 및 관계자들이 많은 고민을 했을 거라고 생각되고, 관객의 비판을 통해 성숙해지길 기대한다.

그 성숙이 몇몇 개인의 발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제작할 장애인 관련 미디어 작업의 완성도를 높이고 사회적 책임을 나눌 수 있는 나아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싶다.

칼럼니스트 박지주씨는 중 2때 척수염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고 재가장애인으로 5년간 집에서 지냈다. 22살 운전을 배워 세상과 어울리면서 24살에 중학교 검정고시에 도전했고, 늦은 28살에야 숭실대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 비장애 중심의 사회와 싸우며 장애인 학습권 침해에 대한 소송으로 세상에 정면도전함으로써 많은 장애인에게 당당한 권리를 알게 했다. 그녀는 그렇다. 산다는 게 행복한 여자. 때때로 밀려드는 어려운 고통들도 삶의 재료라고 여기며, 노래로 풀어버리는 여자다. 가장 은밀하면서도 사적영역으로 치부되어, 자유롭게 섹스이야기를 못하는 사회에 사는 중증장애여성. 장애인의 성을 이야기 하면서, 인간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가질 수 있는 편견과 차별을 되짚어보고, 억압된 성을 풀어헤쳐, 행복한 성을 누리기 위한 과감한 섹스이야기를 진하게 하려고 뎀비는 뜨거운 여자. “자! 장애인들이여! 우리 맘과 몸에 맞는 거 한 섹스 여러 판하고 죽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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