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하나.

상대방과 대화중 도저히 상대방이 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때 떠올리게 되는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오해와 편견들이 존재하겠지만 심지어는 혈연을 나눈 부모와 자식간에도 가슴이 터질 것처럼 답답하고도 커다란 벽이 느껴질 때가 있다.

사춘기 시절,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사소한 일로 어머니와 말다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어머니는 잠시 침묵하시다가 "너도 나중에 아이 낳고 키워봐라. 그럼 내 심정 알게될 거다"하고 말씀하셨다.

당장 엄마와의 마음의 갈등만으로도 속상한데 결혼을 언제, 또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이까지 낳은 후에야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게 될 거라니 철없고 속좁기만 한 철부지 딸이었던 나에게는 어머니의 말씀이 결론없는, 늘상 하는 푸념처럼만 느껴졌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 말은 20여년이 흐른 지금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 해도 매일 하루에 한번씩은 떠오르는 익숙한 좌우명으로 되살아났고, 아이를 키우면서, 더구나 다른 아이들보다 좀더 '개성이 강한' 아들을 키우다 보니 엄마의 말씀은 때로 부모 노릇하기가 주저앉고 싶을 만큼 힘들어질 때마다 꺾인 무릎을 번쩍 일으켜주는 신앙같은 교훈이 되어버렸다.

이야기 둘.

TV에 장애인에 관련된 프로그램이 간혹 나오게 되면 꼭 시청하는 편이다. 장애인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 중에서도 숨을 죽이고 진지하게 시청하게 되는 것은 바로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장애를 가졌다는 것보다 장애를 가진 자식을 키우는 슬픔이 얼마나 클 것인지 조금은 안다. 언젠가 장애자녀를 둔 부모의 역할에 대해 다룬 글에서 자식의 장애를 받아들이는 부모의 감정단계를 자기부정-좌절-수용이라고 쓴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실제로는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아니 이러한 감정의 절차는 복합적일 때가 많고 매일 반복되기도 한다.

한 소아과 병동에서 고개도 제대로 못 가눈 채, 눈동자를 굴리는 것조차 힘겨워 할만큼 아주 약해보이는 한 남자아이가 휠체어에 앉아 있고 함께 있는 아이엄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이에게 정확히 어떤 장애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진료차례를 기다리는 몇 십분 동안 아이엄마가 한순간도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고 아이를 돌봐주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휠체어에 앉아있기조차 힘겨워 보일만큼 너무나 가느다란 팔과 다리를 가진 아이였다. 그런데 엄마의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아이가 뭔가 불편하다는 신호로 한쪽 눈을 살짝 찡그려도 "왜 그래 아가야 어디가 불편하니?"하고 안은 자세를 고쳐주고 아이가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보이면 "너 지금 기분이 좋구나. 그렇지?"하고 엄마는 활짝 웃으며 끊임없이 아이에게 다정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눈길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 아이에게 향했고 두 모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가엔 웃음이 묻어있었다.

그때까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진료실 복도를 뛰어 다니는 승혁이에게 야단만 치며 소리를 지르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는 승혁이의 아주 작은 장애만으로도 늘 어디론가 숨고 싶어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위축되곤 했는데 저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보듬어 앉고 쉴 새 없이 사랑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의 단점까지 받아들여야 완성되는 것이라면 내가 승혁이에 가졌던 사랑이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진정한 부모가 되기 위해 마음만 앞섰지 나의 부족함은 얼마나 큰 것인지 뼈저리게 느껴졌다.

얼마전 어린이집에서 단체로 실내 놀이터를 다녀왔다. 담임선생님께서 오랜만의 현장수업이라 승혁이가 몹시 들뜨고 신나보였다고 하셨다. 온 몸이 흠뻑 땀에 젖도록 신나게 놀던 승혁이가 선생님께 다가와선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아, 땀 나."하더라고 웃으시며 전해주셨다. 그 말을 듣고는 승혁이가 한 말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느껴지던지, 그리고 짧지만 그렇게 자신을 표현한 그 한마디가 얼마나 소중하던지 나도 모르게 "정말이에요?"하고 소리치며 되물었다.

장애아를 키운다는 것이 꼭 그렇게 죽을 것처럼 힘들고 겪지 못할 만한 일은 아니다.

장애아를 둔 가정의 이야기를 남의 일로만 지켜봤을 땐 저 고통을 다 어떻게 감당하나 하고 단지 그들의 삶을 불행할 것으로만 여겼는데 막상 내가 그 입장이 되어 불행에 순순히 항복한 채 하나하나 겪어내보니 반드시 불행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작은 것도 남보다 힘들게 두배, 세 배 노력해야만 얻을 수 있지만 애써서 어렵게 얻었기에 기쁨의 열매는 더욱 달고 값지다.

승혁이에게 가족의 관심과 사랑만큼 더 효과적인 심리치료는 없기에 앞으로 우리의 가족애 또한 돈독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행여 남편과 말다툼할 일이 있을 때 예전에는 '아이들을 위해 참자' 정도였지만 이제는 승혁이 치료에 좋을 일이 없으니 '반드시 참자'하게 된다. 다행히 남편도 요즘은 이런 생각을 하는 눈치다. 어쨌든 남편과 나의 말없는 공감으로 부부싸움을 하는 횟수도 크게 줄었고 설령 싸운다하더라도 승혁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려운 눈길로 엄마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이 우리 부부에겐 더 무서워 서로의 잘잘못 가리기는 나중으로 미룬 채 부부싸움은 그야말로 시작도 제대로 못해 본 채 흐지부지 초스피드로 막을 내리곤 한다.

한편 제 오빠가 자기보다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걸 눈치 채기 시작한 동생 승혜는 엄마가 애써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제 할 일은 제 스스로 해야 한다는 독립심부터 배워버렸다.

가끔은 "엄마 오빠 땜에 힘들어. 그러니까 내가 도와 줄게."하고 벌써부터 딸노릇을 하려 든다. 가끔 저 혼자 그릇을 닦아보겠다고 옷이 온통 젖기 일쑤이지만.

승혁이는 이렇게 저의 말썽으로 인해 가족의 소중함을 역으로 깨우쳐 주었다.

만일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아주 불행하다고 동정한다면 그것은 단단한 껍질 속에 있는 열매가 사실은 더 달콤하고 맛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승혁이와 나는 지금 행복하다. 불행의 견딤 후에 찾아온 행복의 꿀맛을 요즘 넘치도록 맛보고 있기에.

올해 정신지체 3급 판정을 받고 현재 언어발달 및 발달지체를 겪고 있는, 여섯 살된 아들(백승혁)을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아들의 장애를 알기전에는 무조건 장애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싶었는데 막상 아들의 장애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슬픔보다는 앞으로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가 더 막막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자료도 체계화되어있지 못한 현실 속에서 장애아동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연구는 너무나 부족한 실정입니다. 아들과 제가 겪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칼럼 <달팽이>를 통해 실으면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가지고 살고계신 장애아를 둔 부모님들에게 실질적인 임상경험담이 되었으면 합니다. 장애아동의 부모가 되기엔 특수교육에 대한 지식도 턱없이 부족하고 준비되지 못한 부모이지만 일년여간의 심리 및 언어치료와 통합유치원 생활을 통해 이제 겨우 두 음절의 단어와 짧은 동사를 말하기 시작하는 승혁이를 보면서 아주 작은 희망을 엿봅니다. 지금 시작되는 이 작은 희망이 언젠간 지금의 힘겨움을 이겨내고 나중에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으로 발전되길 바라면서 승혁이와 저는 조금씩 하지만 쉬지않고 나아가는 달팽이처럼 꾸준히 열심히 살아가렵니다. 그리고 승혁이와 같은 장애를 가진 장애아동들과 그 가족분들에게 힘내시라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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