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에 목욕탕을 갔다.

여느 날처럼 월풀탕에 몸을 띄워놓고 다리를 막 흔들다가 냉탕으로 갔더니 물이 반도 차 있지 않다. 새벽에 물을 갈아주니깐 이른 시간이면 아직 물이 채워지지 않아서 이런 상태가 종종 발생한다. 할 수없이 초냉탕에 가서 무릎을 잡고 풍풍 뛰어야겠는데 오늘따라 거기 수온이 12도밖에 되질 않는다. 뛰는 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 14도까지는 참고 들어가봤지만 12도는 아무래도 너무 무리다.

할 수없이 나는 16도의 냉탕으로 들어갔다. 물이 없어서 부력이 작용하질 않는다. 나는 겨우 발목 바로 위의 정강이를 붙잡고 오리걸음 같은 자세로 냉탕을 몇 번 오가는 운동을 간신히 끝냈다.

그런데 오늘 하루 종일 어깨가 아팠다. 춤추고 스트레칭 하는 것을 생활화하고 나서부터는 어깨 아픈 일이 없어졌는데 왜 이러지, 그러면서 손이 저절로 어깨 위로 올라간다.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아픈 팔과 어깨를 주무르다가 그때서야 그 이유가 머릿속에 퍼떡 떠오른다. 아침에 냉탕에서 뛰었던 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수위가 낮아서 부력이 작용하지 않으니까 순전히 팔 힘으로만 다리를 붙잡고 쿵당쿵당 뛰어다닌 것이다.

다리가 부실하니까 팔도 덩달아 부실해지는 꼴이다.

그렇다고 팔이 다리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한 몸에 달려 있기 때문에 고통은 그렇게 나누어진다.

물론 그렇게나마 어우러져서 그 상황에서도 몸통이 굴러갈 수 있을 것이다.

부부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다.

한쪽이 아프면 다른 한쪽도 같이 아프고 이쪽이 행복하면 저쪽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나는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지 않아서,

혹은 나한테 무관심하거나 나를 미워해서 괴로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남편은 언제나 나를 사랑해주었고 최고라고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나 남편의 삶이 너무 힘들었다.

그가 헤쳐나가야 할 세상은 너무 위태롭고 조마조마해서 하루하루를 버티어나가는 것이 벼랑 위를 지나가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이 세상에 대한 조바심과 두려움으로 그가 한숨을 내쉴 때면 그때마다 내 가슴이 먼저 무너져내렸다.

당연히 나는 행복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나를 사랑해주고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겨줄지라도 말이다.

나도 겉으로는 왁왁대고 활발해 보였지만, 속에는 늘 주눅 들려 있었고 소심함과 포기하고 싶은 마이너스 감정으로 늘 지쳐 있었다.

엄마로 대표되는 주변의 부정적인 인식과 언제나 나의 소망과는 다르게 나왔던 결과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심어진 피해의식이었다.

대학 때 중등 국어교사 자격증을 딴 나는 졸업 후에 17군데의 학교에 취업서류를 넣었다. 17군데의 학교라는 것은 무작위로 추출된 학교가 아니라 그 당시 내가 도출해낼 수 있는 모든 인맥과,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을 동원해서 가까스로 만들어낸 숫자였다. 그러나 나는 면접 한번조차도 볼 기회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 당시에 국어나 수학 과목의 교사는 졸업과 동시에 배정되던 때였다. 남는 교사가 없으니까 갑자기 공백이 생기면 임시교사를 구하기조차 묘연하던 때였다. 그래서 나한테 돌아온 기회는 임시교사 자리였고 그것도 도서벽지의 한 학교였다.

-그 전에 이미 국공립 학교에 발령을 내는 순위고사에 2등으로 붙었지만 공무원신체 검사법에서 ‘불구 폐질자’로 분류되어 사정없이 탈락되어 버렸다-

교장선생님은 그곳까지 와준 나의 용기에 대해서 격찬했고 그런 나를 위해 방을 구해주고 밥집까지 구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나 1년 후, 정식 교사자리를 위해 문교부(그때 당시의 교육부)에 진정서를 제출했을 때 그 때 돌변하던 교장선생님의 얼굴이라니.

물에 빠진 놈 건져놓았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식이 아니냐고, 혹시라도 명예로운 정년퇴직에 작은 얼룩이라도 남을세라 펄펄 뛰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세상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엄마가 우려했던 대로, 몸은 따라가지도 않으면서 머리통에 먹물만 잔뜩 처넣은 실업자가 되어서,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살아갈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게 되자, 17군데의 학교를 소개해주었던 나의 모든 인맥에 얽힌 지기와 사람들이 모두 다 나를 동정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아서 하루도 더 이상 고향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떠나온 객지에서 세상 사람들이 다 반대하는 결혼을 올렸으니, 나는 이미 속이 썩을 대로 다 썩은 몸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전지전능하게 돌봐주시던 어머니와 35년을 같이 지내다가 처음으로 떨어져 나왔으니 모든 것이 다 처음의 경험이었다. 물론 그동안 혼자서 갈고 닦은 실력과 내공은 상당한 수준이었지만 사회라는 것은 사회대로 요구하는 기준이 또한 있게 마련이었다.

남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처음으로 운전을 시작하여 익숙해져는 그 긴 나날 동안, 나는 늘 쩔쩔매는 남편의 뒤에 함께 서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아이를 낳았고, 이사를 해야 했고, 중고차라도 구입을 해야 했고, 이러한 모든 과정을 겪는 동안 현장에서 뛰어야 하는 역할은 모두 내 차지였다. 그때마다 우리 남편은 무슨 기준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나? 그 결정을 과연 믿을만한가에 대해서 나한테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러나 나도 잘 몰랐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고 조언을 구했을 뿐, 또 잘 모르는 가운데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마지막 상황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들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발생하고 해결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나 하나를 통해서 이 모든 확신을 다 얻기를 원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어릴 적의 기억 한 두가지를 꺼내야 할 것 같다.

어릴 때 처음으로 본 플라스틱 장난감 중에 나를 미치도록 홀리게 만든 것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릇 모형이었다. 색깔도 이쁜 분홍빛, 연두빛으로 만든 대접 모양의 그것은 어른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인데도 동그란 굽까지 앙징스럽게 둘러져 있어서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게 1원짜리 사탕을 하나 사면 그 봉지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으로 요즘으로 치면 사은품 같은 것이었다. 나는 사탕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든지 1원을 만들어 그 그릇을 한 개라도 더 사 모으는데 온 신경을 다 빼앗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방안에서 기어 다니고만 있을 때라 그 심부름을 언니가 대신 해다 주었는데 한번은 이가 빠진 그릇을 사온 것이 아닌가?

나는 그걸 바꿔오라고 언니한테 떼를 썼는데, 언니는 요리조리 피하기만 하고 바꿔다주지를 않았다.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고 그걸 보다 못해 손님으로 오신 고모가 대신 1원을 주었다. 그래도 나는 그 억울함이 풀리지를 않았다.

언니가 제대로 된 물건을 사 왔더라면, 지금 고모가 주신 이 돈으로 또 하나를 더 살 수 있었을텐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깝고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플라스틱 장난감이 얼마나 조잡했고, 더구나 그 그릇이 손톱처럼 얇은 모형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가 빠지거나 금이 생기는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더구나 포장지는 뜯어지고 사탕은 먹어버렸으니 누가 그걸 바꿔주겠는가.

나보다 불과 두 살밖에 더 먹지 않은 언니는 벌써 그런 형편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는 형제가 육남매인데다 사촌들까지 같이 지낼 때가 많아서 방 한 개에 보통 다섯, 여섯 명이 복작거렸다. 그러다보니 없어지는 소지품도 많았고 어디 뒤섞이다보면 찾지 못할 때도 많았는데, 나는 이런 상황을 항상 힘들어했다.

그런 중에 내 뇌리에 깊이 박힌 기억이 있다.

내 책을 동생이 뽑아서 헝클어놓았는데 그게 너무 속상해서 악을 쓰면서 소리를 쳤다.

“제 자리에 갖다가 꽂아!”

그러나 그 책꽂이도 나 혼자의 것이 아니라 여러 형제가 함께 쓰는 공동의 것이었기 때문에 나처럼 내 것만 챙기려고 들지 않으면 한데 섞이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동생이 내가 지정해놓은 자리에 꽂는 것이 아니라 약간 비켜난데 그 책을 꽂았다.

“거기가 아니잖아?”

나는 또 소리를 쳤다.

동생이 간신히 내 자리를 찾아서 책을 꽂았는데 이번엔 거꾸로 꽂았다.

“제대로 꽂지 못해!!!!”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나 싫어서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동생이 얼른 책을 뽑아서 바로 꽂았다. 그런데 그게 내 눈에는 가지런하게 보이지를 않고 뭔가 울퉁불퉁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게 또 속이 상해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장면이 내 인생에서 되풀이되며 연출되는 것을 나는 자주 보곤 했다. 그 때 내속이 얼마나 찢어질 듯이 화가 나던 그 느낌도 아직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순간이 오면 그냥 놓아버린다.

애장이 끊어지도록 화를 내는 것보다는 울툴불퉁, 그냥 냅둬버리자, 그런 적당주의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남편한테서 계속 이 모습을 보았다.

그는 끊임없이 화를 냈다.

왜 그러냐고 댐비면 나한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한테 그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한 시대의 한 공간 안에서 부부라는 이름으로 엮어진 우리는 한 몸에서 나온 두 지체니까 저쪽이 힘들면 이쪽도 허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났다.

남편은 이제 이력이 난 사회인이 되었고 컴퓨터 그래픽의 출판 분야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리고 그도 온갖 과정을 다 거치면서 한편으로 지치고 한편으론 노련해져서 인생이 좀은 수월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그는 아직도 완전무결한 생활에 대해서 양보하지 않는다.

식사는 반드시 새로 지은 밥에, 새로 끓인 국에, 새로 꺼내온 김치여야 흡족해 한다. 아이쿠, 내 몰라라~ 나도 힘들어 죽겄네, 그러면서 그 중에 하나라도 묵은 것을 그대로 꺼내 놓는 배짱이라도 부릴라치면 금방 그의 얼굴이 무섭게 변한다.

이젠 나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맞받아쳐서 같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아니면 횅,하니 무시해버린다.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그가 원하는 대로 새 밥을 지어서 그의 앞에 대령하는 일이다. 현실적인 생활에 찰싹 밀착되어 있지 않는 나를 늘 철딱서니 없는 마누라라고 구박하지만 그래도 이런 마음쯤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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