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속에서 나를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하는 것은 나한테 있어서 숙제와 같은 것이었고 뒤에는 이것이 화두로 변했다.

우리 나이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방안에서 기어 다니고, 방안에서 용변을 해결하던 나는 조금 눈치가 생기기 시작하자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기어다니는 것을 멈추고, 볼일 보는 것을 참게 되었다.

사춘기가 될 무렵부터는 이성을 좋아해서도 안 되었지만 설령 좋아한다고 해도 그걸 가리는 것부터 배웠다.

임시교사 생활조차 끝나고 다른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하루종일 고향집 방안에 처박혀 있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어린 조카를 데리고 둑으로 나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다. 소꼴 먹이러 나온 누가 빤히 바라보기라도 할라치면 나는 자신을 숨기다못해 지워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정쩡한 소읍이라 서로의 형편을 거의가 다 알만한 사람들이었다. 너 삼거리집의 목발 타는 아이 아이가? 그래, 요새는 뭐하고 지내노? 그들은 다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후배 피아노 학원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는 아이들이 올 시간이 되면 나는 밖으로 나가버리거니 아예 문을 닫고 방안에 처박혀 있기가 일쑤였다. 컴컴하게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명랑한 아이들 눈에 보이고 싶지 않았다. 후배인 원장이 간식을 갖다달라거나 무슨 일이 있어서 날 부르면(그 후배도 휠체어 장애인이다), 나가기 전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눈과 입을 좌우로 움직여 얼굴 근육을 풀고 나서야 비로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외출을 하려면 반드시 머리를 감아야 했고 옷은 다려 입는 것으로 알았다. 요새처럼 뜨거운 물, 찬물 펑펑 쏟아지는 아파트 같으면 샤워도 몇 분 만에 해치우는 세상이지만 그 때는 달랐다. 특히 우리 집은 펌푸로 퍼올리는 물이 너무 센물이어서 이걸로 머리를 감으면 비누가 떨어지지 않아 허연 떡이 되었다. 그래서 빗물을 받아놓거나 엄마가 다른 집에 가서 수돗물을 길어와야 했는데 식구가 많다보니 이 물이 준비되지 않을 때가 다반사였다. 다리가 멀쩡하면 나라도 가서 길어 올테지만 그러지 못한 형편이니 이것 때문에 외출을 포기해야 되거나 속을 끓일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외출에 차질을 빚는 나를 볼 때마다 친구들이 또 칠보 단장이냐고 놀리곤 했다.

너무 자신을 볶는 상황이 되면 그냥 놓아버린다고 앞글에서 큰 소리를 쳤지만, 그래도 이렇게 까탈스러운 면이 많아서 아침에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는데 누가 벨을 누르면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일단 청소부터 마쳐놓고 단정하게 몸단장이 되어야만 비로소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 들어오기 전에 나는 먼저 클러치를 짚고 서 있어야만 했다. 한 식구거나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기어서 다니는 내 모습을 결코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결혼을 하고나서부터는 점점 더 복잡한 양상으로 변해갔다.

혼자 몸이었을 때는 드러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내가 나가면 그 자체로 끝이었다. 그러나 두 몸이 한 두릅으로 엮어지고 나서부터는 나머지 한 몸의 정체도 밝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어정쩡하기 이를 데 없는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그렇다고 해도 당당하게 나서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게 말처럼 간단명료해지지가 않았다.

한 사람은 가고 싶은데 한 사람은 가고 싶지 않은 상황이 생겨나면 혹시라도 서로의 장애 때문인가 하는 의구심도 생겨나고, 또 움직이기 힘든 부실함이 두 배로 더해지니까 그것도 서로 배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아무튼 서로가 서로를 잡아당겨서 주저앉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면 나는 오히려 튀어서 반격하는 편이고 남편은 주저앉혀서 때가 되길 기다리는 편이었다. 자연히 나는 이 상황에서 포기되지 않으려고 더욱더 방방 뛰게 되고 그때마다 남편은 완전한 시기, 무사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도록 나를 붙잡았는데 이게 또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릴 때는 어디 나가려고 하면 그 때마다 우리 엄마가 나를 붙잡았다.

그 몸으로 어딜 갈라카노?

비올 것 같은데 가기는 어딜 가노?

같이 멋모르고 뛰어갔다가 친구들은 저거 몸 성하다고 다 뛰가뿌고, 니 혼자 남을낀데 그기 뭐가 좋다고 죽기 살기로 따라 갈라카노?

다른 극성스런 애들처럼 엄마 말을 무시하고 그냥 밖으로 나가버리면 될텐데, 나는 꼭 나가야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왜냐하면 나도 엄마 못지않게 불안하니까.

그러나 어떤 설명도 엄마가 제시하는 장애라는 난관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나는 다시 붙잡혔고, 그때마다 울음을 터뜨렸고, 그때서야 우리 엄마는 지겨워서 허락을 내리곤 했다. 울라카거든 그만 가뿌라 마!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뛰어 가버린 후였고, 으으윽, 으흑, 울다못해 흐느끼기까지 한 나는 번번이 지쳐서 나동그라졌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나서는 그 역할을 남편이 대신 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은 움직이기에 좋은 때가 아니다.

지난 밤 꿈자리가 안 좋았어.

그러면서 더 보태어진 것도 있었다.

주부가 어딜?

게다가 그것보다 더 심한 건,

나 지금 힘들어.

내 몸은 지금 최악이야.

마지막 이 말은 위의 모든 말들을 다 합한 것보다 더한 구속력으로 나룰 얽어맸다.

이러다보니까 심리적으로도 밀폐되어 다른 사람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잘 나눌 수 없을 때가 많았다.

동기간일수록 더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형제 중에도 그런대로 잘 사는 집일 때는 아예 그쪽에서 말을 걸어오지를 않았다. 특히 동서간이라는 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랬다. 시댁붙이라는 어려운 점이 있는데다, 친동기처럼 흉허물이 없는 세월을 같이 지내보질 못했기 때문에 마음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자기들 잘 사는 모습을 우리한테 보여주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도와줄 만큼 흥청망청한 것도 아니니까 의례적인 인사 외에는 말문을 닫았다.

그리고 못 사는 사람은, 못 산다고 마음 놓고 자신의 어려움을 풀어놓기 일쑤였다.

그런 중에 뭘 모르는 새내기 신부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자신의 어려움을 하소연해오곤 했는데 그 내용이라는 것이 하나같이 뻔한 것들이었다. 남편이 친구를 너무 좋아해서 속상한다든지, 월급이 적어서 외식을 줄이고 적금을 넣었다든지, 시댁간 것만큼 친정에도 가야 되는 것 아니냐는 둥. 수다라는 것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잘난 척, 못난 척, 어우러져야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나는 입에 본드를 붙인 것처럼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저들처럼 일상의 소소한 일로 마음을 상하거나 부부 싸움을 벌일 여력이 없었다.

그들이 투정하고 있는 것들은 사실 내가 모두다 동경해마지 않는 일들이었다.

남편이 일을 마치고 친구랑 어울려서 밤을 새우는 일, 그리고 그 다음 날 속이 쓰리다고 그러면서도 너끈하게 다시 출근을 하는 일.

마누라가 삐져서 가출하면 남편이 달래서 데려오는 일.

길을 모른다고 구박하면서도 씩씩하게 태워다 주는 일.

보리밥 김밥이라도 싸서 아이랑 놀러가는 일.

너희들이 장애인의 심정을 아느냐? 라고 누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너희는 장애인이 장애인과 사는 그 심정을 아느냐?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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