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막힌 공간의 이야기를 나는 소설로 풀어내려고 했다.

이 세상에서의 희망과 전망이 모두 끝나버린 인간이란 과연 어떠한 모습일지, 이러한 인간이 나아가는 세상이란 또한 어떤 세상일지,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계를 작은 정 하나로 쪼아나가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글자를 새겨나가기 시작했다. 한결같이 슬픔과 고통에 절은 단어들이었고 소외와 비탄으로 찌그러진 문장이었다.

이게 무슨 문학이란 말인가.

이게 무슨 예술이란 말인가.

좌절과 비탄 속에서도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길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니면 값싼 자기 하소연에 불과할 뿐이었다.

이때의 심정을 나는, <눈이 내리네> 라는 단편소설에서 이렇게 표현을 했다.

“마치 흑백 영화처럼 조금 덜 검고 더 검은 차이만 존재하는 화면 위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면 유정에 불이 붙어 미친듯이 타오르는 불기둥 뿐이었다. 독일의 베르네 헤이초크 감독이 걸프전 결과를 중심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는 화면에는 다음의 자막이 흘러 나왔다.

-전쟁은 몇 시간 안에 끝났다.

그 후 모든 것은 변해 버렸다-

폐허의 도시에는 날짐승이 날고 검게 탄 흙바닥에는 해골이 널려 있었다. 앙상하게 타버린 차와 탱크들의 잔해가 대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비참한 장면보다도 더욱 우선하여 나의 눈길을 잡아당긴 것은 너무나 평범하게 생긴 어느 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슬픔이 가득한 눈으로 화면의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멍하게 비어버린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세상의 끝을 보아버린 것 같은, 지치고 허망한 모습이었다. 나레이터는 전쟁 중에 두 아들을 잃고 실어증에 걸려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해설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예리한 망치와 드릴과 피 묻은 전기의자가 널려 있는 고문실에서, 그것도 자기가 지켜보고 있는 바로 눈앞에서 장성한 두 아들이 차례로 죽어 넘어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한많은 모성이었다.

검은 차드로를 머리 위에 걸친, 얼굴이 둥근 그 여자는 힘없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했다. 끊임없이 두 손바닥을 맞부비거나 손가락을 들어 무엇인가를 표현하기를 애쓰면서. 그러나 입술은 맥없이 열렸다 닫혔다 할 뿐, 한 마디의 말은커녕 단어 한 자조차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지 아, 아, 어, 어, 라는 힘없이 이어지고 있는 단발마적인 소리들 중에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숨과 비탄의 탄식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서 헛된 동작을 반복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나 역시 그랬다.

검은 차드로의 여자처럼 모든 것을 잃고도, 마침내 자기 목소리까지 잃고도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어서 이 세상을 향해 헛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지고 있지요?

그 노출증 환자 아냐? 라는 소리를 들으면서까지 자신을 발가벗겨 이 세상에 던진다는 것. 그러기까지의 여정과 나름대로의 통찰을 밝힌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군요. 그러나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하고, 차가운 물 한 사발을 벌컥 벌컥 들이키고 다시 시작을 해보렵니다. ^---^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것은 다름 아닌 내 존재의 정당성을 발견해내는 일이었다.

나라는 존재가 많은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는 것처럼, 정말 실수로 인해 잘못 태어난 것이더냐. 하루라도 더 어릴 때 엎어버리지 못했다고 변명처럼 다른 사람들한테 하소연하곤 하던 우리 엄마의 말처럼 진작 엎어버렸어야 할 생명이더냐? 아님 하나님의 사전에는 실수가 없다지만 인간의 수레바퀴 속에서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치명적인 업보더냐?

이걸 밝히자면 나는 장애라는 것을 물고 늘어져야 했다. 그러나 결코 쉬운 주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작가의 뻔한 자기 이야기라고 무시당할 것이 뻔했다. 나는 장애와 상관없는 이야기를 써서 먼저 성공을 하고, 밀란 쿤데라나 보르헤스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대작가가 되는 날이면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이 장애라는 것을 문학 장르의 한 복판으로 밀어넣고 싶었다. 죽음과 사랑과 운명이 피해갈 수 없는 인간의 주제라면 장애라는 인간의 조건 역시 스펙타클한 대 서사시를 만들어내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요렇게 야무진 꿈을 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또아리 틀고 있던 장애라는 것이 제일 먼저 밖으로 나오겠다고 앙탈을 부렸다.

“감히 나를 빼놓고 너를 표현할 수 있겠냐?”

“구태여 나를 표현할 필요는 없잖아. 작가라는 것이 뭔데? 작가는 그 어떤 이야기라도 써낼 수 있는 것이 작가야. 나라는 자의식이 문학 속에 들어오면 오히려 더 협소해지고 편협해질 뿐이라구.”

나는 아는 척을 하며 점잖게 장애한테 타일렀다.

그랬더니 장애가 코웃음을 치면서 빈정댔다.

“그래 좋아. 나를 제외시키기 위해서 너를 표현할 필요가 없다구? 그럼 너를 뺀 너의 세계는 어떤 것이지?”

나는 완전 케오 패였다. 소설이라는 것은 아무리 광대한 주제라고 해도 결국은 일상의 뼈와 살에 의지해서 그걸 드러낼 뿐이다. 설사 환상적인 이야기라 해도 환상적인 일상이 요구되기 마련이다.

이 말은 작가의 가장 근접한 생활이 결국 든든한 자원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도 나는 이걸 피해보기로 했다.

지 땜에 내가 고통당한 것이 얼만데, 손가락으로(다행히 나는 손가락은 멀쩡했으니깐) 글만 쓰면 되는 문학에 이르기까지 지를 끌고 다녀야겠는가.

지겹고도 지겨운 것.

징허고도 징헌 것.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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