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함께 성묘를 마치고 돌아가는 승혁이

지난주 승혁이는 가을여행 겸해서 시골 할아버지댁을 다녀왔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승혁이를 데리고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이나 갔다 와야지 하고 금요일 밤부터 마음 먹으려던 찰나 난데없이 승혜(승혁이의 동생)가 "엄마, 나 시골 가구 싶다"하고 내뱉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고 연거푸 "시골, 시골"하고 외쳐댑니다.

"갑자기 시골을 어떻게 가니. 빵빵 타고 한참 가야 되는데?"

그러자 딸아이는 지지않고 "그럼 아빠 와서, 어어, 빵빵 타고 가면 되잖아"하고 힘껏 제 목소리를 높입니다.

단숨에 자기 생각을 쏟아내느라 혀 짧은 목소리가 더욱 해석하기 힘들기까지 하지만 시골에 가고 싶다는 자기 마음을 분명히 전하려는 듯 숨까지 헉헉대며 얼굴이 빨개지도록 흥분해서 말하는 네 살배기 딸아이를 보니 기가 막혀 웃음이 나오려고 합니다.

승혜가 갑자기 시골행을 외쳐댄 이유가 뭘까 하고 잠시 생각해보니 바로 금요일 낮에 도착한, 시골 아버님이 부쳐주신 쌀 푸대를 보고서 문득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졌나 봅니다.

역시 아들보다는 딸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고들 하는데 지금껏 승혁이의 말하는 목소리를 가뭄에 콩나듯 어렵사리 듣고 있는 까닭에 제 오빠보다 훨씬 빨리 말문이 트이고 말 뿐만 아니라 제 의견까지 분명하게 낼 줄 아는 딸이 기특하고 고맙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 날 딸과 아빠가 뭔가 텔레파시가 통한 날이었는지 밤 11시 넘어서 퇴근한 남편이 느닷없이 내일 시골에 갈 것이니 간단히 짐을 싸라고 합니다. 이번 주말 토요일에 내려가서 일요일 오후에 올라오자고 합니다. 사실 시골 어머님댁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만은 않습니다.

초가집에서 시멘트를 바른 양옥으로 개조는 했지만 여전히 아이들 씻기기에는 춥고 불편한 목욕탕, 변화무쌍한 시골날씨에 아이들 여벌옷 한 벌씩에 평소에 밥 잘 안 먹고 시골에 가면 노느라고 더더욱 밥을 안 먹는 승혁이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이들 반찬거리까지 따로 챙기다 보면 고만고만한 짐 꾸러미가 세 네 개나 되고….

그런데 시골행을 앞두고 이런저런 걱정거리는 제쳐두고 어떻게 부녀의 마음이 이토록 일치한 것인지 제게는 그것이 더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역시 핏줄은 다른가 봅니다.

평소 12시가 넘도록 잘 자지 않는 특이한 체질인 두 아이들이 밤늦게 퇴근한 아빠의 무릎과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자 남편은 "내일 시골 할아버지 보러 가자"하고 말하니 하루종일 '시골' 노래를 불렀던 딸아이가 일단 '와'하고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리고는 제 오빠에게도 "내일 시골 간대"하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잘은 알 수 없지만 뭔가 기쁜 일이 있다는 '감'을 받았는지 이어서 승혁이도 '와'하고 손을 치켜듭니다.

다음날, 설악산 단풍놀이 관광객으로 꽉 막혀있을 줄 알았던 도로는 생각보다 시원스레 잘 뚫리고 설악산은 아니지만 미시령 못지않은 산세와 정취를 가진 이화령 고개에서 교통정체 없이 가을 햇살에 갖가지 붉은 색깔로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우리 가족만의 오붓한 단풍관광을 했습니다.

솔직히 시댁으로 가는 길과 영동선으로 가는 고속도로 갈림길에서 슬쩍 가을바다가 보고 싶어지기도 했지만 이제는 자식들 가족 이루고 잘 살고 우리 두 늙은이 가는 일만 남았다며 아무렇지 않게 말씀하시며 허탈하게 웃으시던 어머님의 얼굴이 떠올라 한시라도 빨리 시골에 가서 어머님을 뵈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전화만 하시면 "승혁이는 좀 어떠냐"하고 물어보시는 어머님께 지난번보다 조금이라도 더 커진 승혁이와 승혜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산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화려한 카펫을 펼쳐 놓은 듯 산을 온통 감싼 단풍의 향연에 마음까지 붉게 물들어갑니다. 단풍이 물드는 이유는 식물의 잎에 있는 태양에너지를 흡수하는 색소가 기후 등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라고 얼핏 들은 적이 있는데 누군가의 도움 없이 제 몸의 성분만으로도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섭리에 그저 고개가 숙여지고 경이로울 뿐입니다. 우리에게도 자연처럼 낯선 환경과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제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늦더라도 언젠간 좋아지겠지'하는 소박한 기대와는 달리 아침마다 어린이집 가기 싫어서 가끔 현관 앞에서 드러누워 울어버리고 요즘은 다가오는 차에게 돌진하거나 멀쩡한 남의 차를 툭툭 발로 차는 고약한 '취미'까지 생겨버린 승혁이.

하고 싶은 일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길 한복판에서건 어디서건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며 누워 버리고 놀이터에선 아이들에게 모래를 뿌려대 '괴물'이라는 별명을 가진, 장난꾸러기 악동 승혁이의 단점들과 싸우느라 매일 숨가쁜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단점투성이 승혁이에게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숨겨진 장점들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결코 알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승혁이의 숨겨진, 무한한 잠재력을 아직 발견하진 못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돌출되는 승혁이의 문제행동에 화를 내기보다는 아이의 단점을 조금씩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엄마가 되기로 하면서 지금부터라도 승혁이의 숨겨진 장점 찾기를 시도해 보려 합니다.

아직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쓰러질 것 같은 힘없는 어린 묘목과도 같은 승혁이지만 가을이 올 때까지 제 몸 속에 아름다운 색깔을 꽁꽁 감추어 두었다가 시기가 되었을 때 한껏 제 몸의 빛깔을 눈부시게 발하는 가을의 단풍처럼 언젠가는 승혁이도 저만이 가진 소중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올해 정신지체 3급 판정을 받고 현재 언어발달 및 발달지체를 겪고 있는, 여섯 살된 아들(백승혁)을 키우고 있는 엄마입니다. 아들의 장애를 알기전에는 무조건 장애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싶었는데 막상 아들의 장애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니 슬픔보다는 앞으로 아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가 더 막막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자료도 체계화되어있지 못한 현실 속에서 장애아동에 관한 구체적인 사례연구는 너무나 부족한 실정입니다. 아들과 제가 겪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칼럼 <달팽이>를 통해 실으면서 저와 비슷한 어려움을 가지고 살고계신 장애아를 둔 부모님들에게 실질적인 임상경험담이 되었으면 합니다. 장애아동의 부모가 되기엔 특수교육에 대한 지식도 턱없이 부족하고 준비되지 못한 부모이지만 일년여간의 심리 및 언어치료와 통합유치원 생활을 통해 이제 겨우 두 음절의 단어와 짧은 동사를 말하기 시작하는 승혁이를 보면서 아주 작은 희망을 엿봅니다. 지금 시작되는 이 작은 희망이 언젠간 지금의 힘겨움을 이겨내고 나중에 웃으면서 추억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으로 발전되길 바라면서 승혁이와 저는 조금씩 하지만 쉬지않고 나아가는 달팽이처럼 꾸준히 열심히 살아가렵니다. 그리고 승혁이와 같은 장애를 가진 장애아동들과 그 가족분들에게 힘내시라고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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