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사무총장에 당선된 이종욱 박사(국민일보 자료사진)

2월 5일자 모 일간지에는 유엔과 관련한 두 개의 기사가 실려서 눈길을 끌었다. 하나는 한국인 최초로 세계보건기구(WHO ; World Health Organization) 사무총장에 당선된 이종욱 박사(58)가 4일 보건복지부 회의실에서 21세기 세계 속의 한국 역할을 강조한 기자회견 내용을 소개한 기사였고, 또 다른 하나는 지난 1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에서 국제아동권리협약의 국내 이행상황 2차 보고서 심의를 받은 우리 정부 대표단이 잇따른 거짓보고로 외교적 망신을 당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 기사들을 보면서, 현재 세계장애인계가 온통 심혈을 기울이며 노력 중인 국제장애인권리조약이 탄생한다고 한들, 과연 한국 정부가 제대로 이행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긴 한숨만이 신문을 뒤덮었다.

지난 1월 1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아동권리조약 2차 정부보고서 심의에서, 한국 정부 대표단은 1996년 1차 보고서 심의 당시, 있지도 않은 아동권리를 위한 국가위원회가 활동 중인 것으로 보고한 것에 대해, 공식사과한 데 이어, 2차 보고서에서조차 아동권리조정위원회의 역할을 허위보고한 사실이 밝혀져, 공개적으로 해명을 요구받았다고 그 일간지는 보도했다.

한편, 멕시코 정부는 유엔에 장애인의 인권과 관련한 국가간의 구속력 있는 협약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그러한 멕시코 정부의 노력이 있어 유엔총회는 『장애인의 권리, 존엄 및 보호에 관한 포괄적이고도 통합적인 조약』에 관한 특별위원회 설립을 결정했었다. 작년 초에 멕시코는 그 협약의 초안을 만들었고, 멕시코시티에서 개최된 전문가위원회의 제안을 바탕으로 수정된 개정안을, 작년 7월 말부터 뉴욕에서 열린 유엔특별위원회에 제출했다. 올해 5월 혹은 6월 경에 제2차 유엔특별위원회가 열릴 예정이고, 그 내용이 2003년 제58회 유엔총회에 보고될 것으로 전망된다.

만약 장애인인권에 관한 국제조약이 생긴다고 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유엔회원국들은 그 조약을 준수하기 위한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그 결과 각 나라의 장애인 인권상황은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에 세계장애인계는 요즈음 온통 이 문제에 전념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의 국제아동권리협약 이행상황보고에서처럼 한국 정부가 협약 준수에는 관심 없이 허위보고서나 작성하려고 한다면, 현재 우리나라 장애인들이 장애인인권조약에 거는 기대감들은 한낱 물거품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이러한 우려가 깊어지는 이유는 우리에게 돌이키고 싶지 않은 씁쓸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1992년에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UN ESCAP)에서 결의된 아태장애인10년(Asian and Pacific of Decade Disabled Persons, 1993-2002)의 행동계획(Agenda for Action)은, 12개 영역 중 국가적 조정 영역에 있어서, 장애인문제를 다룰 국가조정위원회의 위상, 구성, 기능을 규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는 1996년에 국무총리 소속 하에 장애인복지조정위원회를 구성했고, 이러한 한국정부의 성과를 포함하여, 1999년에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UN ESCAP)는 국가별 보고서를 편찬했다. 그러나 그 장애인복지조정위원회는 실제로 1년에 한번 소집되기도 어려웠었고, 국가적 조정업무를 맡아서 실무를 집행할 사무국이나 담당자가 하나도 없었다.

이종욱 박사는 기자회견에서 50, 60년대에 한국이 WHO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았지만, 이제는 사무총장 배출국으로서 WHO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물론 좋은 얘기지만, 장애인의 한사람인 내가 한국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멕시코 정부의 반만이라도 따라갈 생각을 하라는 말 밖에는 생각나는 말이 없다.

지금도 보건복지부 홈페이지를 접속하게 되면, 자동으로 이종욱박사의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 당선을 축하하는 내용의 팝업창이 뜨게 되어 있다. 매번 그 창을 닫으면서도 기쁜 마음보다는 씁쓸함만 느껴지는 이 땅의 장애인들 심정을 정부 관계자들은 알고나 있을까?

이 글은 ‘이광원의 소비자로서의 장애인(column.daum.net/sojang)’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

칼럼니스트 이광원은 장애인 보조기구를 생산·판매하는 사회적기업 (주)이지무브의 경영본부장과 유엔장애인권리협약 NGO보고서연대의 운영위원을 지냈고, 소외계층 지원을 위해 설립된 (재)행복한재단의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우리나라에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 패러다임이 소개되기 시작하던 1990년대 말 한국장애인자립생활연구회 회장 등의 활동을 통하여 초창기에 자립생활을 전파했던 1세대 자립생활 리더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국제장애인권리조약 한국추진연대’의 초안위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사)한국척수장애인협회 사무총장, 국회 정하균 의원 보좌관 등을 역임한 지체장애 1급의 척수장애인 당사자다. 필자는 칼럼을 통해 장애인당사자가 ‘권한을 가진, 장애인복지서비스의 소비자’라는 세계적인 흐름의 관점 아래 우리가 같이 공감하고 토론해야할 얘깃거리를 다뤄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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