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울며 지내던 어느 날 언제나 당당하시던 할아버지의 흐느끼시던 뒷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가 왜 우시는 것일까.

바닷가에서. ⓒ이복남

“할아버지가 나 때문에 우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가 3학년 때 쯤 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우시는 것을 보고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체육시간에는 교실 지킴이였고 가을 운동회 때가 되면 운동장 스탠드에서 연습하는 아이들을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운동회 당일에는 결석을 하고 가족들과 나들이를 했다. 어머니의 배려였던 것이다. 그런데 동생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운동회 당일에도 더 이상 결석을 할 수는 없었다. 동생이 입학한 첫해 가을 운동회에서 스탠드에서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는 신세에 어머니와 화장실에서 둘이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든지.

학교에서는 언제나 말없이 조용한 아이였다. 그러나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볼 때면 비록 지금은 힘이 없지만 언젠가 힘이 생기면 그때는 가만 두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했다.

“내게 상처 준 아이들에게 반드시 내 앞에 무릎 꿇고 사과 하게 만들 거야.”

그동안 장애를 가진 사람을 별로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에 병신은 나 혼자 뿐인 거야” 그래서 매일 놀림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아이가 전학을 왔는데 어머니 등에 업혀 오는 게 아닌가. 한 언니는 한쪽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짚고 다니는데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지내는 모습도 보였다.

“나도 저렇게 할 수가 있을까.” 그로부터 학교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손녀딸을 애처롭게 여기시는 할아버지가 “미애야 예배당에 한번 댕기 바야. 다리도 낫게 해 준 당께.” 이웃에 교회 다니는 친구가 있었고 할아버지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덕유산 설천봉에서. ⓒ이복남

교회에 가면 다리를 낫게 해 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다. 그런데 해가 가고 달이 가도 다리는 낫지를 않았다. 그러다가 소아마비는 특별한 치료 방법도 없다는 말을 듣고 실망하여 교회를 그만둘까도 생각하였다.

“하나님께 자기 소원을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 하면 그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얘기와 눈먼 자를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걷게 한다는 말씀들을 보면서 저도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신앙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이가 들면 여수 애향병원에서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기에 중학생이 되자 어머니는 애향병원에 문의를 했고 수술 날자가 잡혔다. 중학교 2학년을 마치고 휴학계를 내고 애향병원에 입원을 했다.

맨 처음 왼쪽 다리 허벅지에 일리자로프를 설치하는 수술을 하였다. 일리자로프는 1980년대 러시아의 정형외과 의사 일리자로프(Ilizarov) 박사가 개발한 원통형의 외고정기기를 이용하여 하루 1mm정도 다리뼈를 늘이는 시술법이다. 애향병원에서도 그가 일리자로프 수술의 첫 케이스였기에 두 달 정도 입원을 했었고 4cm 정도를 늘였다. 그리고 몇 달 뒤에는 뒤꿈치 인대를 늘이는 수술을 했고 정강이뼈 수술 등 1년에 세 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하고 물리치료를 받으면서는 희망에 차 있었다. 이제 병원을 나서면 다른 친구들처럼 같아지겠지. 남들처럼 똑 바로 걸을 수도 있고 뛰고 달릴 수도 있겠지. 꿈에 부풀어 수술의 고통도 꿋꿋하게 이겨 낼 수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수술하기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는 아니었던 것이다.

“복학 후 첫 체육시간에 꾀병으로 수업에 빠지는 친구들을 보면서 차라리 내 다리랑 바꿔서 내가 체육시간에 다른 아이들과 함께 수업에 동참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그날 혼자 참 많이 울었습니다.”

누가 더 예쁜가요. ⓒ이복남

그동안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그는 언제나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할 수 없어서 못하는구나. 그래서 선생님도 내게는 안 시키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자신이 할 수 없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었다.

그의 어깨는 항상 왼쪽으로 치우쳐 있기에 조례시간에 운동장에 줄을 설 때 앞사람의 뒤통수를 똑바로 바라보면 그의 어깨는 언제나 줄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어느 선생님이 오른쪽으로 한 발짝 들어가서 어깨 줄을 맞추라고 했다. 처음으로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배려해준 선생님이었다.

그러자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설악산을 갔는데 “미애야 갈 수 있겠니?”하며 격려해 주신 선생님 덕분에 힘들었지만 정상까지 갔다 올 수도 있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작해서 똑같이 마무리 할 수는 없을지라도 포기 하지 않고 끈기 있게 하면 된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갔다.

*박미애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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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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