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내가 근무하는 센터로 일본에서 귀한 손님이 왔었다. 지적 장애인들의 세계적 모임으로 피플퍼스트라는 것이 있는데 그 피플퍼스트 재팬에서 동경지국 사무국장으로 일하시는 사사끼 노부유키라는 분이 지원자 한 분과 함께 오신 것이다. 9월에 한국에서 있을 장애인 세계대회를 위해 협의 차 오셨는데 고맙게도 시간을 내 주셔서 우리 센터와 간담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아직 우리나라의 여건상 전(全)장애영역을 포괄하는 것을 이념으로 하는 자립생활센터에서 조차도 지적 장애인은 그에 대한 고민만 있고 실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적 상황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해 주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여기서 부족하지만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피플퍼스트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앞서 말했듯 피플퍼스트는 세계적인 지적 장애인 단체이며 운동이다.

1960년대 후반 스웨덴에서 처음 지적 장애인들의 당사자성을 강조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며 시작된 피플퍼스트는 미국과 캐나다 등을 거치며 세계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갔다. 1973년 미국의 오리건주에서 열린 대회에서 ‘장애인이기 이전에 사람이다’라는 말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1991년에는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전국조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은 1993년 캐나다에서 열린 피플퍼스트 세계대회 참가를 계기로 1994년부터 시·도를 돌며 전국대회를 치러 활성화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노력 끝에 일본의 피플퍼스트는 이제 전국조직으로 발돋움하였으며 당사자 주체성을 확보하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발전해 가고 있다.

내가 사사끼님의 강의를 들으며 여러 인상적이었던 것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속도와 ‘우리들 방식’ 이라는 말이었다.

우리는 흔히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느리다’라고 얘기한다. 이제껏 장애인의 결점 중 하나로 생각되었던 이 사실은 그러나 요즘 자립생활을 이야기하는 곳에서는 이런 사실의 객관성을 인정하며 오히려 이것이 장애인의 강점으로 여겨지며 강점화 하려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빠른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하는 한국사회에서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느림을 이야기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우리는 이미 너무 빨리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일본의 피플퍼스트는 1년에 1지역씩 그 지역의 장애인들로 준비위를 구성하여 3개월, 6개월을 소비하며 전국대회를 치른다고 한다. 그리고 3년이 걸려 전국 연합회인 피플퍼스트 재팬을 만들었다고 한다.

4~5년 사이 70여개의 센터가 생기고 연합회와 협의회 등의 단체가 생기게 된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면 참으로 속 터지게 느린 속도다. 하지만 이 느림에서 머리 쭈뼛한 감동이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사사끼님의 강의에서 그들이 이렇게 느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들 방식’ 때문이었다.

‘우리들 방식’이란 아무리 느려도 모두가 이해하고 참여해야지만 일을 진행시키는 방식을 말하며 다른 대리인이 아닌 스스로 일을 진행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느릴 수밖에…. 지적 장애인의 눈높이에 철저히 맞춘 이런 방식은 우리 자립생활센터에서도 지향하는 바이지만 앞에서 말했듯 쉽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좀 더 빨리 많은 장애인에게 혜택을 주어야 하고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플퍼스트는 이 방식을 철저히 지킨다고 한다. 그게 그들이 수많은 대리인과 대변인들 사이에서도 꿋꿋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비결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피플퍼스트가 전국 연합조직을 만들 때 피플퍼스트 전국협의회로 할 것인가? 피플퍼스트 재팬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1년을 토론했다는 이야기와 정관을 만드는데 3년이 걸렸다는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론이 이론만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찌릿했던 것이다.

자립생활 운동은 흔히 우리 사회를, 지역을 장애인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장애인을 기준으로 변화된 세상은 모두의 삶에 좋은 기준이 되리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믿음이 이론만이 아닌 실제가 되기 위해선 실천이 필요하다. 느림의 미학. 이것이 장애인이 생각하는 변화된 세상의 키워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난 피플퍼스트를 만난 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빠른 세상이 아닌 느린 세상을 만드는 것,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돌아보고 둘러보며 함께 가는 세상, 이게 장애인이 이 세상에 기준으로 던질 수 있는 메시지가 되지 않을까? 느린 장애인이 보여 줄 수 있는 느림의 미학으로, 빠른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아닌 우리에게 맞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해 보자.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모두가 함께하는 장애인 문화, 느림의 미학으로.

(소중한 생각을 일깨워준 피플퍼스트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리플합시다]장애인들은 이명박 대통령당선자에게 이것을 바란다

*저의 마지막 칼럼이었습니다. 그동안 변변치 못한 글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마지막 글로 지적장애들에게서 제가 느낀 느림에 대한 이글을 쓸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하며 글쓰기를 게을리 한 저로 인해 폐를 끼친 모든 분께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한국 최고의 장애인당사자 신문인 에이블뉴스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던 영광스런 기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17년간 재가 장애인으로서 수감생활(?)도 해봤고 시설에 입소도 해봤으며 검정고시로 초중고를 패스하고 방통대를 졸업. 장애인올림픽에서는 금메달까지 3개를 땄던 나. 하지만 세상은 그런 나를 그저 장애인으로만 바라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알게 된 자립생활! 장애라는 이유로 더 이상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 분리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상이 꿈꾸는 곳. 장애인이 세상과 더불어 소통하며 살 수 있는 그날을 위해 나는 지금 이곳 사람사랑 양천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근무하며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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