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으로 응원하러 온 가족. ⓒ배은주

“난 엄마가 유명해졌으면 좋겠어.”

큰딸아이가 애써 나의 눈을 외면하며 말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라는 마음으로 태연하게 물었다

“그건 왜”

한참을 망설인 끝에 딸아이가 다시 말을 이였다.

“친구들이 엄마를…장애인이라고..놀려….”

나는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에... 늘 언제나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준비물을 깜빡하고 가져가지 못한 날 그 준비물을 갖다 주러 학교에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갈등할 때부터 나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나는 될수 있으면 태연하게 심각하지 않게 아무렇지 않은듯 대답했다

“엄마는 지금도 유명하잖아 엄마는 노래도 하지 방송도 하지. 그리고 또….”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동방신기나 원더걸즈나 아이비 정도는 돼야 요즘 애들은 유명하다고 인정 한다는 것을…. 나는 딸아이에게 괜한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주말에도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아빠와 아이들만 남겨둔 채 공연하러 가야하고,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저녁시간에도 함께 있어주지 못하고, 요즘에는 아침에 등교하는 것도 지켜보지 못하고 방송하러 새벽에 집을 나서야 하고…. 그러면서 나는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CCM가수이지만 어디에 가서도 가수라 자신 있게 말도 못하고, 아직은 너무 미숙한 진행으로 방송인이라 딱히 부를 수도 없으면서 지금 흘러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아이들에 소중한 시간에 함께 있어주지 못한 빈자리는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커져만 가고 있었다. 갈등에 갈등을 거듭하며 나는 한없이 의기소침해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는 커녕 부끄러운 엄마가 되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시원스런 대답을 딸아이에게 해주지 것이 못내 아쉬운 엄마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자고 있는 줄로 알았던 딸아이가 내게 다가왔다.

“엄마! 나는 그래도 엄마가 희망콘서트에서 희망새들과 노래하고 엄마 목소리가 라디오로 나오는 게 너무 좋아요 우리랑 많이 있어주지 못해도 괜찮아요. 나도 이제 많이 컸잖아요.”

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느덧 엄마에게 용기도 불어 넣어 줄줄도 아는 사람으로 자란 딸아이가 너무나 고마워서, 그 응원에 너무나 힘이 나서 나는 그날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마음을 다 잡아 먹었다

공연을 가기위해서는 아이들에 입을 것 먹을 것을 챙겨놓고 노래할 힘도 없이 무대에 올라갔던 일…. 공연에서 돌아와서는 파김치가 된 채로 아이들에 등교 준비를 하고 나서는, 시체처럼 지쳐 쓰러지곤 했던 일. 엄마와 떨어지기 싫어 잠에서 체 깨어나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는 엄마를 향해 울고 또 우는 둘째를 두고서 매정하게 집을 나와야 했던 일. 이 모든 일들이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기위한 몸부림 이였다. 나의 휠체어가 아이들에게 자랑꺼리가 되기위해 나는 애쓰고 또 애쓰며 살아 왔던 것이다.

이 아이들이 어디에서건 엄마를 이야기 할 때 우리 엄마는 “장애인이야”라고 자랑스럽게 말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그런 나의 마음을 딸아이가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그 모든 일을 다 이루어 놓은 듯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은 다가올 2008년에도 더 힘차게 더 열심히 해낼수 있을것만 같은 큰 용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3살 때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서 장애인이 됐으며 초·중·고교 과정을 독학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96년도에 제1회 KBS 장애인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하면서 노래를 시작하게 됐고 97년도에 옴니버스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1년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작품현상공모’에서 장려상을, 2006년 우정사업본부 주최 ‘국민편지쓰기대회’ 일반부 금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에 ‘2006 전국장애인근로자문화제’ 소설부분 가작에 당선되었다. 현재 CCM가수로도 활동 중이며 남녀 혼성 중창단 희망새의 리더로, 희망방송의 구성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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