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다보면, 곤란한 입장에 놓일 때가 더러 있다. 이번에 통과된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을 대면하는 필자의 처지가 그렇다. 비판하자니 대의에 주눅 들고, 옹호하자니 눈에 띄는 허점이 너무 많다. 더구나 법 제정운동에 참여했던 필자로서는, 그 결과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지만,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장애 사회가 장차법의 의의와 한계를 오롯하게 알고 있어야 할 만큼 이 법이 중요한 까닭이다.

장애인들은 오랫동안 장차법을 꿈꿔왔다. ‘열린네트워크’가 이 법 제정을 처음 주창한 지 6년,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가 결성된 지 4년 동안 고단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꿈이 너무 절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장애인 사회는 무관심했고 경제계의 반대는 노골적이었지만, 장애인들의 꿈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 ‘꿈’을 이루었다. 그것도 당사자의 힘으로 일궈낸 승리였다. 스스로 법률초안을 만들고, 하나 되어 싸운 결과였다. 미국(1990년)과 영국(1995년)을 비롯한 몇몇 나라가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었지만, 모두 국가 주도형이었다. 우리보다 10년 먼저 시작한 일본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축배를 들어 자축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잔을 내려놓는 그 순간부터 냉정해야 한다. 과연, 장차법이 장애인의 ‘현실’을 바꿔 놓을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보기에, 적어도 지금의 장차법으로는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그 징후는 언론 보도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장차법이 통과되던 3월 6일 저녁 뉴스에서, 공중파 방송3사는 장차법 통과 소식을 외면했다. 그 이튿날, 주요 일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애 사회의 열기와 대조적으로, 비장애인 사회의 반응은 썰렁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될 당시 주요 언론들이 앞 다퉈 보도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의 장차법이 주류사회에 전혀 ‘위협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정말 그럴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그렇다!

그 이유를 따져 보면 이렇다. 법이란 모름지기 강제력이 있어야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통과된 ‘장애인차별금지및권리구제등에관한법률’은 차별의 범주들은 꼼꼼하게 열거한 반면, 단서 조항들을 덧붙여 피해자의 권리구제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법 통과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장추련 초안을 제멋대로 자르고 덧붙인 탓이다.

우선, 제4조는 ‘정당한 사유’, ‘과도한 부담’, ‘현저히 곤란한 사정’ 따위의 모호한 단서 조항들을 붙여 차별행위의 범위를 대폭 축소시킨다. 어렵게 입증하여 차별로 인정받더라도, 구제받는 것은 더 어렵다. 강제 수단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는 탓이다. 가령, 제43조가 규정한 시정명령을 보자. 국가인권위원회가 차별 권고를 했는데도 ‘정당한 이유없이’ 이행하지 않는 가해자에게만 법무부 장관이 시정명령을 ‘할 수 있다.’(‘해야 한다’가 아니다) 그런데, 단서 조항이 있다. 피해자가 다수이거나, 차별행위가 반복적이거나, 고의적으로 시정을 불이행하는 가해자에 한해서, 피해자의 피해 정도가 심각하고(‘심각하거나’가 아니다) 공익에 미치는 영향이 중대해야 한다. 개인의 권리구제를 위한 인권법이 공익까지 고려하다니, 얄궂다. 이런 조건에서 장애를 가진 개인이 어떻게 시정명령을 받아 낼 수 있겠는가?

제49조 벌칙 조항도 마찬가지이다.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는, 그 행위가 ‘악의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또 단서 조항이 있다. 여기서 악의적이라 함은 차별의 고의성ㆍ반복성ㆍ보복성ㆍ피해의 내용과 규모를 ‘전부’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이제, 판사의 재량 영역까지 제한한다.

이처럼 무지막지한 단서 조항들 탓에 장차법의 권리구제 수단들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인권법이라기보다 권리선언을 읽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장차법 제정이라는 ‘꿈’은 이루었으되, 차별받는 장애인의 ‘현실’은 쉬이 나아질 것 같지가 않다.

사정이 이러하니, 비장애인 사회가 큰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법 개정이 회자되고 있다. 그 시기가 언제든, 장애 사회의 ‘꿈’과 ‘현실’ 사이를 메우는 또 다른 싸움이 불가피해 보인다. 어쩌면, 지금까지보다 더 깊고, 더 길고, 더 치열한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몇몇 장애인 단체 활동가를 거쳐 지금은 부산에 있는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화의 정치>, <장애학: 과거, 현재, 미래>, <동정은 싫다>, <장애와 사회, 그리고 개인> 같은 장애학 서적을 번역했습니다. 장애학 특히 장애 역사에 관심이 많고, 지금도 틈틈이 자료를 읽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류 학계가 외면하는 장애인의 역사를 현재와 연결하여 유익한 칼럼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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