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해는 너무나 짧습니다. 어둑어둑 내려앉은 땅거미에 가로수 그림자가 스며들 즈음, 헤어지기 위해 마주 선 세 아이는 새끼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합니다.

“가자마자 편지 쓰는 거다.”

“당연하지.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한달에 한번씩 그림으로 그려 보내는 것도 잊지 말기!”

세 아이는 크게 ‘약속!’하고 외치고는 엄지로 도장까지 찍습니다.

그날 저녁. 늦도록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던 빛나가 한창 김치 버무리느라 바쁜 엄마 앞에 나타나더니 엉뚱한 부탁을 합니다.

“엄마, 내가 정확하게 말하는지 좀 봐 주세요.”

빛나 엄마는 ‘그런 쓸데없는데 짓 하지 말고 당장 숙제부터 해’하고 야단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무뚝뚝하니 “어디 한번 말해 보렴.” 합니다.

“안녕. 내 이름은 빛나야. 별명은 꽃돼지.”

빛나가 유난히 입술에 신경을 쓰며 말한다는 걸 눈치 챘지만 빛나 엄마는 일부러 모르는 척, ‘정확하게 말하는구나, 꽃돼지라니….’하며 빈정거립니다.

“엄만! 그거 말고 입모양말이야.”

빛나가 짜증을 내자 마침내 엄마가 버럭 언성을 높입니다.

“입 모양이 뭐가 중요해, 말하는 내용이 중요하지! 대체 너, 공부는 언제할거니? 벌써부터 외모에나 신경 쓰고, 원…!”

빛나는 샐쭉해서, ‘에구 답답해. 엄마하고는 차라리 말을 말아야지.’하더니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같은 시각. 정원이도 엄마 곁에서 설거지를 도우며, 겨울방학 계획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원이 엄마 표정도 영 떨떠름합니다.

“그게 겨울방학 계획이라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그림으로 그려보겠다는 게? 아니, 보이는 것도 안 그리던 녀석이 왜 갑자기 들리는 것까지 그리겠다는 거야?”

“에후, 그런 게 있어요. 엄만 설명해도 몰라요.”

정원이가 무심코 한 말이 그만 엄마의 신경을 건드리고 맙니다.

“뭐? 너 엄마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니? 바로 그거야. 엄마를 무시하는 바로 그 ‘엄만 몰라요’하는 말! 대체 내가 뭘 모르는지 말해봐. 한번 들어나 보자.”

“아, 글쎄 말해줘도 엄만 모른다니까요….”

“뭐, 뭐야?”

미연이도 집으로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내내 그림편지 얘기뿐이었습니다.

“정말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구나. 귀찮아하지도 않고 내내 필담을 나누어주었다니.”

미연이 엄마는 미연이가 친구들을 사귀어서 좋아했지만 미연이한테 그 친구들이 왜 더 특별한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느낌, 곁에 없어도 함께 하는 친구란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요.

피곤한 듯 살포시 잠이든 엄마 곁에서 미연이는 나지막한 소리로 자꾸자꾸 말을 건넸습니다.

‘엄마, 나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그려 보낼 거예요. 들리지 않아도 난 알아요. 그 아이들 웃는 소리가 얼마나 예쁜지. 그 환한 얼굴들을 그리다보면 내 귀에도 예쁜 웃음소리가 가득할 거예요.’

<작은 세상>의 작가 최현숙은 첫돌 지나 앓은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을 졸업하며 시를 접었다가 2002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해 2005년 구상솟대문학상 본상(시인상)을 받았다. 지금은 동화작가·콘티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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