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이틀째 아빠와 함께.

2005년 9월. 국립재활원에서 정기검진을 받고 이범석 과장님과의 진료 중에 나의 결혼 사실과 남편을 소개하게 되었다. 그때 과장님은 부부의 성 문제와 아이문제에 대해서 상담해 주셨다. 그때까지 나는 임신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장님은 서울대학병원 전종관(위험임산부 전문) 교수님을 소개해 주시며 장애여성으로도 충분히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으며 아이로 인한 행복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몇 개월 후 우리 부부는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임신 사실을 알고부터(임신6주) 서울대병원으로 진료를 다녔다. 그러나 나는 나의 장애 때문에 아이에게 장애가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과 10개월이라는 임신기간을 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또 병원의 편의시설에 대한 불편함도 많았지만 교수님의 자상한 상담과 친절한 배려로 많은 두려움과 걱정을 접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노산(여성나이 35세 이상)으로 교수님께서 권해주시는 다양한 검사(양수검사, 정밀 초음파, 태동검사, 당뇨 검사 등등)를 모두 받아 아이의 상태도 확인할 수 있었고 나의 심리적인 안정도 찾을 수가 있었다. 또 경추장애로 폐활량이 작아 임신후기에는 숨이 많이 차니 임신 초기부터 폐활량 훈련을 하라고 하셔 열심히 호흡연습도 하였다. 그렇게 교수님의 처방대로 임신기간을 외출 한번하지 않고 아이만을 위해 착실하게 보내며, 임신32주가 되어 양수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아무 이상 없이 아기가 주수대로 잘 자라고 있다고 하였는데 초음파 검사 결과 양수가 적고 아기의 몸무게도 잘 늘지 않는다고, 양수가 계속 줄면 아이에게 이상이 생길 수 있어 당장 수술해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입원해서 지켜보자고 하셨다.(양소 과소증이나 양수 비대증이 심할 경우에는 아이에게 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2006년 7월 4일 근심과 걱정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 후 나는 매일 분만실에서 초음파검사로 양수 양을 체크하였고 태동검사로 아이의 움직임을 확인하였다. 다행히도 입원기간 동안 양수 량은 줄지도, 늘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고 아이의 체중은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늘고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9개월이라는 긴 임신기간 동안 많은 고통과 역경이 있음에도 나의 딸(의인)은 엄마 장애의 특성을 알기나 하는 듯,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너무도 순하게 조용하게 나의 자궁 속에서 조금씩 자라며 잘 견디고 있었다. 태아는 34주가 지나면 세상에 나와서도 살 수 있을 정도로 모든 장기들이 성숙되어 진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경추장애로 자연분만이 어려워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수술준비를 위한 다양한 검사를 하였다 .특히 예전에 사고로 수술한 후 항생제 부작용으로(스티븐 존슨 병) 많은 고생을 하였기 때문에 교수님은 더 세심하게 검사와 수술준비를 하며 2주간(임신33, 34주)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리고 2006년 7월 20일 오전 8시 30분. 임신 34주 6일째. 나는 수술을 하게 되었고 밤새 긴장과 떨림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 계속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제발, 나의 아이가 아무 이상 없이 건강하게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세요.”

“저도 수술 후 부작용 없게 해주세요.”

또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처음 대면 할 때 무슨 말을 해줄까? “의인아! 사랑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너무도 더운 여름. 예정일 보다 36일 먼저 나의 아이는 태어났다. 1.84kg. 누구나 저체중에 미숙아로 태어난 나의 아이가 당연히 인큐베이터에서 자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의 딸은 태어나는 순간 작지만 아주 야무진 울음소리로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는 감동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소아과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 "체중은 작지만 아주 야무지게 잘 영글었네요. 신생아실로 가도 되겠어요."

그리고 아이를 수술하신 의사선생님은 "엄마 힘들까봐 아이가 뱃속에서 많이 안 컸네. 효녀네”라고 하시며 웃으셨다. 너무도 감사할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작게 낳아서 아이를 볼 때마다 눈물이 가슴으로 흐르며 너무도 나의 딸에게 미안한 마음뿐 인 것을 알기나 하는 듯 나의 딸은 신생아 90%가 온다는 황달도 없었고 신생아실에서 제일 건강하고, 제일 예뻐서 S병원 신생아실의 엄지공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나와 같이 퇴원하여 우리 부부의 마음을 위로 해주었다.

단지 몸이 불편한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 축복 받지 못하고 태어나기도 전부터 근심, 걱정거리로 기쁨보다는 눈물로 임신기간을 보내야했던 나에게 그래도 뱃속에서 열심히 움직이며 “엄마! 힘내세요”하면서 건강하게 잘 자라주어서 너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다.

누군가 "부모는 아이를 선택해서 낳을 수 없지만 아이는 부모를 선택해서 온다는" 말이 나의 가슴속에서 맴돌게 한다. 장장 9개월이라는 시간을 그림 한 점 그리지 못하였지만 새 생명을 창조한다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며 나에게는 최고의 명작이 아닌가 생각한다.

무대위에서 춤을 추는 무용수에서 교통사고로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었고, 재활치료로 만난 그림은 제2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게 하였다. 현재는 아내, 엄마, 화가, 임상미술치료사. 한국장애인표현예술연대 대표... 예술을 통해 꿈, 희망, 도전 할 수 있는 교육, 전시, 공연기획, 제작을 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하는 기획자,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과 장애, 세상과의 소통, 나의 내면과의 화해를 통해 힐링 할 수 있는 다양한 예술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소소하게 풀어내며, 그 안에서 나를 찾고 감동과 눈물로 또 다른 삶의 경험을 통해 꿈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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