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와 함께 할것을 약속하였고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고심했다. 특히 우리는 그는 초혼이고 나는 재혼이기에 각자의 부모와 가족들이 어떻게 여길지 걱정이었는데 그러한 걱정은 그 보다도 내가 더 심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누군가를 한 번도 사귄 적이 없기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오케이라는 것이다.
나는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들이 나의 존재를 알아가기 시작했고 과연 그의 말대로 누구하나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조차 잘됐다는 사람들뿐이었다. 부모님들을 처음 됐을 때 나의 손을 잡고 ‘어디 있다 우리 식구 되려고 이제 나타났냐?’고 말씀하시던 시어머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남은 문제는 우리 부모님이었다. 우리 부모님들은 내가 아이만을 키우며 혼자 살기를 바라셨다. 내가 재혼하면 아이가 불행해 진다고 생각하셨다. 우리 엄마는 예전에도 나에 대해 재혼 얘기가 나오면 '꿈에도 그런 생각 말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그리고 당신 딸이 장애인일지라도 같은 장애남성 그것도 시각장애남성과의 결합을 얘기하게 되면 부모님들의 그 깊고 깊은 편견과 맞부딪칠 것을 생각만 해도 나는 무척 두려웠다.
그러나 결국 용기를 내어 나의 부모님들께 말씀을 드렸다. 생각했던 것보다 지나친 반응은 나오지 않았지만 나중에 엄마가 말씀하시는데 얘기를 들었을 때 너무 기가 막혀서 두 분다 할 말을 잃었다고 하셨다. 엄마가 내게 꼭 그래야만 하냐고 물으셨다. 장애가 있어도 왜 하필 시각장애인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장애의 종류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우리 결혼의 1등 공신은 바로 우리 유나였다. 유나는 아빠 될 사람이 너무 좋다고 엄마랑 아빠가 빨리 결혼 했으면 좋겠다고 우리 아버지, 그러니까 자기 할아버지한테 강력히 얘기했고 우리 아버지는 끔찍하게 여기는 당신 손녀의 말을 받아들이셔서 승락을 하게 된 것이다. 유나가 아빠 될 사람을 싫어했다면 아마 상황은 힘들어졌을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그의 마음이 아이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심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허락을 받아냈다. 그 이면에는 물론 아이의 영향이 컸지만 우리 부모님들이 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음을 인정하신 부분도 분명 작용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부모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데리고 독립을 감행했던 전적이 있으니까.
이렇게 해서 우리는 2004년 2월 kbs 제3라디오 장애인방송인선발대회를 통해 경쟁자로 처음 만나 그 해 9월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해 2006년 5월 5일, 그러니까 근 1년 8개월 만에 웨딩마치를 올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