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정치인들이 많이 사용하고, 학교에서도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도 한다. 정의가 인간의 최고의 덕목이라는 것은 별로 이견이 없어 보인다. 그러면 도대체 정의가 무엇일까?

정의를 알기 위해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정의는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라고 한다. 다시 진리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진리란 ‘참된 이치 또는 참된 도리’라고 나와 있다. 다시 도리를 찾아보았다. 도리란 ‘가야할 바른길’이라고 되어 있다. 정의도 올바른 길이고, 진리도 올바른 길이고, 도리도 올바른 길이라니 그러면 정의와 진리와 도리는 모두 같은 뜻이란 말인가!

진리는 도리만이 아니라 이치도 포함하는 차이가 있고 올바르다는 말은 참되다는 말로도 표현하니 참은 거짓이 아닌 진실을 의미한다. 진리는 도덕과 철학, 과학에도 사용되고, 정의는 정치나 철학, 도덕에 사용되며, 도리는 도덕에 사용되는 정도의 차이인가?

인류는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진리를 탐구하여 왔다. 예수는 진리는 하늘의 영역이고 정의는 땅의 영역이라 정의를 찾기 위해 이 땅에 왔다고 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인간이 알고 있는 진리는 모두 허구이거나 뜬 구름 잡는 소리일 수도 있겠다.

정의는 올바른 것이라고 했으니, 편중되지 않고 균형을 잡은 공정과 공평을 의미하는지, 악이 아닌 선을 의미하는지, 질서와 안녕을 말하는지 혼란스럽다. 어린이 동화나 만화에서 정의는 악을 물리치는 것으로 표현된다. 역사적으로 마녀사냥도 정의를 위해 한다고 하였으니 마녀가 악인지, 마녀사냥이 악인지, 마녀 세상이 지옥인지, 마녀사냥하는 이들이 지옥세상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시련을 당하는 이들은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신념 아래 참고 견딘다. 정의는 개인적 신념인지, 절대적인 것인지, 정치적 도구인지 알기 위해 이론가들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살펴보자.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는 정의는 평등과 공평으로 ‘각자에게 자신의 몫’을 주는 것이라 하였다. 공평하기 위해 규칙을 정하는데 그 규칙은 보편적 법칙이라고 여겨질 때만이 정당화될 수 있다. 정의는 공평과 정당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공평은 권리와 책임을 모두 포함할 것이다.

정치 정의는 정의를 권리라고 해석한다. 공평하게 권리를 행사하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공평의 법칙이 문제이다. 똑 같이 나누어야 하는 권리가 있고, 재산권처럼 역할에 따라 몫을 달리해야 하는 권리도 있다.

부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야 하는 것도 있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절대로 빼앗아서는 안 되는 권리도 있다.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도 있고, 면제해 주어야 하는 책임도 있다. 여성의 국방의무는 면제해 주고 있으며, 장애인의 노동의 의무는 면제될 수 있으나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거나 능력별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차별적 기회나 대우를 하기도 한다. 장애인의 최저임금 제외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회 정의는 배분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격차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각자의 몫이라고 하여 각자에게 맞는 몫이 아니라 몫이 없는 빈손에도 몫을 주어야 한다. 정의가 개입되지 않으면 착취가 일어나 계층 간의 격차가 심해지고 누구에게는 생존권마저 잃게 만든다.

민법에서 손해를 보상하도록 하는 것이나, 형법에서 처벌을 하는 것은 정의의 조정적 기능이다. 법은 정의를 위해 존재하지만 법은 정의롭지 못한 부분을 포함한 완전한 정의에는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 생명체로서 계속 발전하며 정의에 다가가도록 변해야 한다. 불완전하지만 최소한의 장치인 것이다. 불완전하지만 정의라는 포장지를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장경제에서 정의는 ‘타자에게 좋은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상호작용에서 자기만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교환 정의 또는 분배 정의로 볼 수 있다. 상인이 이윤을 극대화하면 폭리가 되는 것이니 적정선을 정의로 본 것이다.

울피아누스는 정의는 각자에게 그의 권리를 승인하려는 변함없는 항구적인 의지라고 했다. 상대의 존재와 인격, 역할과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공정과 공평의 균형을 잡는 기준이 될 것이다.

벤담은 정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고 했다. 이는 공리주의 해석으로 다수가 행복한 길을 찾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수가 아닌 소수의 희생이 따를 수 있다. 칸트가 말한 정의에는 의무를 정의 개념에 포함시킨 것인데, 다수의 행복을 기준으로 하고 보니 의무라는 개념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한다. 헌법에서도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이다. 공리주의적 정의로 인해 집단의 행복을 추구하다 보니 개인은 소외되기도 하고, 전체주의에 의해 폭력이 정당화되기도 했다.

정의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 권리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면, 국가는 자유를 위해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하고, 권리를 위해 국가의 책임을 다하고 침해되지 않도록 지원을 다해야 한다. 롤스는 정의는 자유와 권리, 기회 소득과 재산과 자존의 사회적 조건을 포함한 공정한 분배를 위한 사회적 틀이라고 했다.

인간에게는 양심이라는 안테나가 있고 태어나면서 선을 지향하는 유전자를 타고나기에 이에 귀 기울이고 실천하는 것을 정의로 본 이도 있다. 신중한 판단과 무지의 베일을 벗기 위한 노력을 요구한 것이다.

자유보다는 평등을 정의로 보는 이도 있다. 특히 평등은 기회의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치들이 필요하다. 불평등은 가장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 가장 큰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여 해결한다. 각자의 몫에서 강한 자는 직분에 맞게 더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지지 못한 자에게 더 돌아가게 하여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공동의 선의 문제라며 공동체의 질서를 강조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다문화주의에 의해 소수자들의 정의도 다루어지고 있다. 소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다수사회의 횡포를 독재라고 하였다. 이 이론에 의하면 장애인에 대하여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못하면 독재가 된다. 롤스의 차등원칙을 거부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는 사회정의는 환상이며, 단지 시장의 게임만이 존재한다고 자유를 강조했다. 평등주의자들은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불이익에 대한 보상의 권리를 갖는다고 하였다. 자본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필요를 무제한 충족할 수 없지만, 필요한 것에 집중하면서 사회정의를 고안해야 한다고 필요요구를 정의의 기준으로 본 이도 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평등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불행과 불운을 당한 경우에만 보상을 한다는 평등주의는 낙인효과와 부스러기라는 시혜적 입장을 취한다. 엘리자베스 앤더슨은 정의는 억압을 종식시키는 것이며, 동등한 존재로서 마주하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회 자산은 물질만이 아니다. 권리도 자산이고 정의도 자산이다. 이 자산을 어떻게 분배하는가는 평등, 수요, 소득의 원칙 하에 조정되어야 한다. 교육과 노동, 재화와 용역,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과 비차별, 보건에서의 권리보장, 가족 등 친밀한 관계에서의 비정의적 문화 타파, 약자에 대한 삶의 질 보장 등이 사회적 형편이 아닌 권리적 입장에서 정의는 실현되어야 한다. 지나간 오늘은 오지 않으므로 현재가 중요하다.

성 주류화는 정의 실천의 한 방안이다. 이를 성 정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의 사회통합과 권리보장은 장애 정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의를 위해 만든 법이 억압이 될 수 있어 저항권이 정의에 포함되어야 한다. 승자의 법은 정의가 아니다.

장애 정의는 원인과 과정, 결과에서 불평등을 방지하기 위해 쿼터제와 더불어 역량강화와 비차별을 보완하는 각종 제도가 동원된다. 장애가 자격이고 권리라고는 하지만, 추가적 보완이 아닌 원천적 해결방안으로 접근해 나가야 한다.

당장은 장애인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므로 감면을 한다지만, 감면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감면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필요하다. 어느 노동부 장관에게 한 장애인이 최저 임금도 안 되는 돈으로 살 수 없으니 더 높은 소득을 올리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자, 적은 돈으로도 살 수 있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며 그런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였다.

잠깐 머무르는 장관직이 그런 사회를 만들 권한도 능력도 없다. 어느 복지부 장관은 권리협약을 서약하면서 몇 년 안에 모든 버스를 저상버스로 바꾸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해가 되기도 전에 그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장애 정의는 시급한 문제는 추가적 혜택으로 해결하는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 혜택이 없어져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권리와 평등, 다양성의 인정, 통합사회는 모두 사회 정의의 문제임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독재 속에 부스러기를 던져주는 것이 아닌 진정 사회 자산을 공유하는 장애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올바름이 참이냐 거짓이냐 ‘참참참 게임’을 하지 말고, 논리학이나 과학에서 참을 증명하는 복잡한 논쟁을 그만두고, 올바른 길에 장애인을 손잡고 갈 것이 아니라 손잡고 가는 길이 바로 올바른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가, 몫을 잡지 못한 장애인들의 빈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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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환 칼럼니스트
현재 사단법인 장애인인권센터 회장, 한국장애인고용안정협회 고용안정지원본부장을 맡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아·태 장애인, 장애인운동 현장의 소식을 전하고 특히, 정부 복지정책 등 장애인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이슈에 대해 가감 없는 평가와 생각을 내비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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