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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사람이고 사람이 곧 제도이다

“아직도 한국에 살고 있는 거예요?”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1-05-20 14:38:12
“People don’t really like difference. It’s so hard to be different.(사람들은 정말로 다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자폐인)으로 사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Tashi Baiguerra

‘복지선진국에 가면 수많은 장애인들이 거리를 활보 한다!’

솔직히 이런 얘기는 한국에 살 때부터 종종 듣던 소리다. 복지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들을 먼저 경험한 이민 선배들이 쓴 글이나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지만,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이해’하는 일과 매일 일상생활에서 경험으로 ‘대면’하는 일은 질이 다르다.

가령, 한국의 국경을 벗어나면 동성결혼이 합법화 된 나라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국에서 아는 일과 호주의 아이 학교에서 만나는 가족이 성적 지향이 다른 성소수자임을 밝힐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무슬림의 이야기를 한국에서 제3자의 입을 통해서만 접하다가 내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친구가 무슬림이란 사실을 알 때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런 ‘뜻밖의’ 일상들이 한 스푼 두 스푼 더해지다 보면 어느 순간 ‘잘 알지 못하는’, ‘나와는 상관없던’ 사람들의 삶과 나의 삶이 수시로 겹치고 있다는 자각에 이른다.

“한국에서 평생 살면서 만날 장애인의 수보다 호주에서 일년 살면서 만나는 장애인의 수가 더 많겠네.”

멜버른 정착 초기에 외출을 하면 자동으로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장소,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응당 장애인들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고 사회가 말을 거는 듯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시로 목격하는 장애인들이 직접 몸으로 증명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호주 장애인들이 누리는 일상을 보면서 한국의 이민자가 받는 충격이 크면 클 수록 한국이란 사회가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매정하고 야박 했는지를 깨닫는 지표가 되는 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두 나라를 사는 일은 계속해서 예전의 사회와 현재의 사회를 비교하고 차이를 발견하는 일이어서 모국의 문화나 제도가 때론 장점으로 때론 단점으로 읽힌다.

“진짜 당황 했었잖아. 밖에만 나가면 장애인이 너무 많은 거야. 호주 환경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서 장애인이 이렇게 많은 건가 의심까지 했잖아.”

한국 살 때는 장애인을 접촉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호주에서는 일상이 되었다는 한 지인의 이야기다. 결국 그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한국 이민자들이 그렇듯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된다. ‘한국에 장애인 숫자가 적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회로 나오기 어려운 조건이어서 갇혀 살고 있었다.’

한국에 살면서 몸에 밴 문화와 관습은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난 아직도 눈앞의 광경을 보면 입이 쩍 벌어지곤 한다.

가령, 어느 주말에 찾아간 공원에 조금 과장하면 장애인 반 비장애인 반이 섞여서 각자의 방식대로 즐기는 진풍경이 펼쳐질 때. 장애인 직원이 울워스(Woolworths, 한국의 홈플러스나 이마트 같은 대형 슈퍼마켓)의 계산대에서 물건을 스캔하면서 고객과 안부를 묻고 답하며 한참을 얘기 중인데도 뒤에 선 손님들이 너무나 태연할 때. 발달 장애인이 도움견을 동반하고 쇼핑센터를 다닐 때(Assistance Dogs, 시각장애인을 위한 안내견 외에도 발달장애인들의 감정/자기돌봄 지원을 위한 테라피/도움 지원 견들이 많음). 휠체어를 탄 장애 아동 가족이 활동지원사를 동반해서 캠핑장에 왔을 때.

나의 상상을 넘어선 장면을 목격할 때마다 놀라는 나에게 남편이 가끔 하는 말은 진실 일지도 모른다.

“아직도 한국에 살고 있는 거예요?”

한국에 비해 사회적 약자들이 권리와 존엄을 조금은 더 누리고 사는 사회란 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터득하게 되듯이 이민 생활이 길어지면서 깨닫게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호주의 구성원들도 한국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란 점이다. 더군다나 한국처럼 ‘단일 민족’은 커녕, 전 세계에서 몰려온 이민자들이 인구의 절반 가까이를 채운 나라인데 두 말하면 잔소리다.

다시 말하면, 한국인에 비해 선천적으로 친절하고 따뜻하고 선한 사람들이어서 장애인과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포용과 관용이 높은 것이 아니라, 국가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소한의 안전망을 한국보다 일찍 제도적으로 보장해 줬을 뿐이다.

가령, ‘장애인 탈시설화’ 논의가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고, 한국보다 약 15년 전에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고, 아직 한국은 ‘포괄적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았다면 호주는 2017년에 이미 ‘결혼 평등법’이 통과 되었다.

‘제도가 사람이고 사람이 곧 제도이다’란 사실을 호주에 살면서 깨달았다. 좋은 제도를 만들고 실천하는 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고, 좋은 제도는 결국 좋은 사회 구성원을 길러내는 선순환을 한다.

21살에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은 멜버른 출신 타쉬의 말처럼 “다른 사람”으로 사는 일은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을 아들이 매일 일깨워 준다. 상대적으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높고 복지 지원이 다양하고 촘촘한 멜버른에 살아도 장애 당사자나 부모의 삶은 그 자체로 여전히 강도가 세고 밀도가 높다.

지금이야 자폐인 아들과 사는 일이 도전적이면서도 기쁘고 오늘 천둥번개가 내리쳤다면 내일은 해가 쨍쨍 내리쬐는 인생이란 걸 이해하지만, 벤이 어릴 때는 하루하루가 지뢰밭을 혼자 헤매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벤의 짜증과 분노와 특이함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이 들 때면, 번뜩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시달려야 했다.

그 컴컴한 터널을 어떻게 건넜을까, 자폐 아동을 나보다 먼저 키워낸 부모들의 이야기와 자폐 아동의 부모이자 자폐 관련 전문가들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위로가 되었다.

“살아보니까 다르게 살아도 괜찮더라.” 그들의 속삭임은 정말이지 마법의 주문 같았다.

요새는 ‘발달장애 전문가’, ‘자폐 아동의 부모’라는 명함을 가진 사람들보다 자폐 당사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산다. 다행히 호주에는 십대 청소년, 이십대 청년, 성인 자폐 당사자들이 당당하게 세상속으로 나와 본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자폐인 커뮤니티의 연대와 환대를 이끄니 이 얼마나 멋진 나라란 말인가.

‘엄마 내가 세상을 어떻게 다르게 보는지 말해 줄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마치 음성이 지원되어 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인 양 착각에 빠지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폐 당사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읽어내는 일이 습관이 된다.

아들이 선물해준 ‘자폐인의 렌즈’를 통해 알게 된 세상은 너무 빠르고,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너무 소란스럽고, 본인들에게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정보가 주어지고, 비언어적 표현들이 난무한다. 어쩌면 비자폐인들이 태고적부터 믿어 온 ‘스스로 가둔다’는 자폐의 정의는 자폐인의 관점에서 보면 순전 엉터리인지도 모른다.

‘스스로 가둔 게 아니라, 세상이 온통 비자폐인에게 최적화 되어서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다.’

주말에 벤을 데리고 집 근처 쇼핑센터에 갔다. 활동 보조인을 동반한 휠체어를 탄 할아버지, 활동 보조인을 동반한 발달 장애 청년, 엄마와 쇼핑을 나온 발달장애 여성, 발달 장애 아동을 데리고 나온 가족 등 수많은 장애인들이 일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다양한 장애 당사자들이 지역사회로 나와서 섞이고 어울리는 모습을 보는 일은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 내가 아는 한, 이들의 발걸음은 그냥 발걸음이 아니다. 세상의 편견과 차별에 저항하는 발걸음이고, 동료 장애 당사자나 가족들에게 존재의 좌표를 찍어주고, 오늘도 절망에 휩싸여 삶의 의미를 잃어 버린 누군가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얼마전 한국에서 발달 장애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세상을 등진 날, 한 페친님의 절규가 나는 너무 애통하다.

“어느 나라에서 자식 키우다가 힘들어 죽는 부모가 이렇게 많은 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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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이루나 (bom022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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