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NOT be passive. Educate yourself about your rights and the possible resources available to your child.” (학교와의 관계에서) 수동적인 자세로 임하지 말라. 당신의 권리와 당신 자녀에게 가능한 자원들을 찾기 위해 공부하라)-Michael A. Ellis-

모든 주사위는 던져졌다. 호주 빅토리아주의 모든 초·중·고등학교는 12월 중순에 종업식을 하고 긴 여름 방학(남반구에 위치한 호주의 계절은 한국과 정반대다)에 들어간다. 내년 학급 편성과 담임 배치가 모두 완료되는 시점이다.

엄마도 당분간 한숨을 돌린다. 10월 중순부터 약 두 달간 각종 정보를 모으고 내가 끌어 쓸 수 있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고, 아들 벤과 친구들과의 역학관계를 살피고, 학교의 교장과 담임교사와의 소통을 유지하느라 동분서주했다. 학교가 장애 당사자 부모들에게 가장 먼저 의견을 피력할 기회를 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고마워서 한국에서 온 엄마는 고단함도 잊는다.

‘근심과 걱정이 취미인 듯 불안이 높은 아이들’, 토니 애트우드 박사가 자폐성 장애 아동들을 묘사한 것처럼 벤 또한 낯선 사람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경계와 불안이 언제나 엄마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다 보니, 담임교사의 자질이나 학급 친구들과의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일상의 크고 작은 파급 효과들은 비장애아동들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일년간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고 ‘등교거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다며 나름 열심히 등교를 할 것인가를 판가름 하는 순간이고, 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학습 내용을 전달하고 과제를 제시하면 충분히 배움이 일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사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벤은 ‘수학 능력이 저조한 아이’로 일 년을 살아가야 하니 엄마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담임과의 상담 횟수를 이주에 한번 할 것인가, 일주일마다 할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순간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국에서 교사일 때는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던 반 편성과 담임 배치에 대해 큰 문제의식이 없었는데, 호주에서 벤을 키우면서는 매년 가장 큰 과업이 되었다. 교사일 때는 너무나 자연스럽던 일들이 엄마, 특히 발달장애 아동의 엄마가 되어 보니 너무나 낯설고 부당한 일들이 되곤 했다.

내가 교사로서 오랫동안 경험한 한국의 새 학년 학급 편성과 담임 배치는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 순식간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호주에서 학부모로 생활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 중요한 결정을 학교 구성원들(학생-학부모-교사)간에 공유할 특별한 교육적 철학과 서로가 이해할 만한 소통도 없이, 행정상의 편의와 학교와 교사들의 입장에서 일방적으로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호주에서 학부모로 일이년 살아보면 금방 깨닫게 된다. 사는 나라가 바뀌는 일, 당연했던 일들에 의문을 품게 되는 일이기도 하다.

호주 학교에서의 트랜지션(transition, 초등이나 중등학교에 입학하는 시기나 매년 학년이 올라가는 시기를 말함)은 교사를 비롯한 아동과 학부모 모두가 참여하여 소통하며 조율하는 일년 행사들 중 중요한 과정이다. 호주에서는 기본적으로 아동들에게 급작스런 변화를 최소화하여 스트레스와 불안을 줄여주려는 장치들이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에 처음 입학하는 아이들의 학교 적응을 위해서 입학 전 6개월 전부터 매달 한번씩 등록한 초등학교에 가서 적응 연습을 하도록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고, 연말 종업식 전 일주일은 새 학년 교실과 새로 만날 교사와 새 학급 친구들과의 적응 기간으로 보낸다.

학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벤이 다니는 학교의 새 학년 반 편성과 담임 배치는 약 두 달 간에 걸쳐 진행된다. 10월 중순경 교장이 각 가정에 보내는 이메일로 시작을 하는데, 새 학년 학급 편성에 대한 절차와 교육적 고려사항과 교육적 의미 등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를 제시한다. 그리고 특별한 요구(special needs)를 지닌 장애 아동이나 부가적인 고려사항(additional support)이 필요한 아동의 가정으로부터 가장 먼저 의견을 수렴한다. 학교 공동체의 구성원들 중 약자나 취약 계층에게 가장 먼저 우선권을 부여하는 일, 호주 학교 사회의 암묵적 동의다.

장애 아동의 학부모로 호주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훨씬 부담이 적다. 호주의 교육시스템이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하고 호주 교사들의 자질과 역량이 최고라는 뜻이 아니라, 약자들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점, 그들의 의견을 우선 경청할 자세와 그들의 요구 사항을 최대한 수용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사실, 교육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절반의 장애물은 넘어선 기분이 든다. 좀 멋진 사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한다면 어려운 일이 닥쳐도 방법은 모색하고 만들어 내면 된다.

“벤에게 발달이 다양한 아이들에 대한 경험이 많고, 인내심과 융통성이 높은 교사로 배정해 주세요.”, “학부모와 열린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교사를 배정해주세요.”, “벤의 어려움을 지원(support)하고 재능과 장점을 확장(stretch)시켜 줄 교사를 배정해 주세요.”

해마다 교장의 이메일을 손꼽아 기다리던 엄마는 바로 답장을 보낸다. 비장애인들은 잘 눈치 채지도 못하는 고기능 자폐를 지닌 벤에게 엄마가 공식적인 진단명을 준 이유이기도 하다. 벤을 이해하고 돌보고 교육할 핵심 키를 학교에 제공했으니, 학교도 최대한 개별화된 맞춤형 교육과 지원을 해달라는 정중하지만 엄중한 요청이고, 벤의 교육권과 학교에서의 웰빙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들을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다행히 지금까지 교장은 최대한 합리적이고 타당한 교사와 학급을 배정해 줬다.

이제 엄마는 사시사철 공부하는 사람으로 거듭났다. 엄마가 아는 지식과 정보와 권리만큼 벤을 지원하고 자원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을 한때 학교의 내부자였던 엄마는 잘 알고 있다. 더 분명한 점은, 교사에게 벤은 여러 아이들 중에 한 명이고, 엄마에게 벤은 세상에 하나 뿐인 자식이란 점에서 계속해서 벤과 우리의 입장과 권리를 옹호(advocating)하고 목소리(voice)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한숨 돌렸으니 이제는 슬슬 움직일 시간이다. 일년간 엄마와 호흡을 맞추려면 담임교사도 마음의 채비가 필요할 거라고 믿으며 새 학년 시작 전에 <벤의 프로파일>을 작성해서 보낸다. 벤의 강점과 약점, 흥미와 재능, 수업이나 친구 관계에서 고려해야 할 점, 자폐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이트나 자료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간절히 기대한다.

‘성의 있는 교사라면 최소한 주의 깊게 읽어보고, 잘 모르면 리서치라도 한번 해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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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나 칼럼니스트 아이 덕분에 통합교육, 특수교육, 발달, 장애, 다름, 비정형인(Neuro Diversity), ADHD, 자폐성 장애(ASD)가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어버린 엄마. 한국에서 교사로 재직하다 아이가 발달이 달라 보여서 바로 호주로 넘어왔습니다. “정보는 나의 힘!” 호주 학교의 특수·통합교육의 속살이 궁금해서 학교 잠입을 노리던 중, 호주 정부가 보조교사 자격증(한국의 특수 실무사) 과정을 무료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냉큼 기회를 잡아 각종 정보를 발굴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에서 일반 교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호주의 교육(통합/특수)을 바라보고, 아이를 지원하는 호주의 국가장애보험 제도(NDIS) 등에 대해 주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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