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장애인의 일상 및 사회생활을 지원하는 장애인 활동바우처 제도는 장애인의 자조적인 삶을 보장하여 사회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중증장애인에게는 오아시스 같은 제도적 서비스다. 제도적으로 중요한 만큼 서비스를 제공하는 활동지원사 역시 장애인에게 소중한 분들이다.

필자의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나와의 인연을 10년째 이어가고 있다. 중도 실명한 게 10년이니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동안 늘 필자와 함께 한 셈이다.

가사와 육아 그리고 사회활동 등 생활 전반에서 함께하면서 어쩌면 가족들보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겪는 힘들고 부당함을 더 잘 알지 않을까 싶다.

장애인 당사자로서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부딪힐때마다 부당하다 억울하다 하여도 이게 이 시대 장애인들이 딛고 넘어서야 하는 벽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장애인도 아니고 다만 장애인 곁을 지킨다는 이유로 활동지원사에게 함부로 대하는 비장애인을 보면 내가 당할 때 보다 갑절로 화가 나고 속상하다.

활동지원사는 장애인의 보호자도 대신 일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말 그대로 지원하는 사람으로 장애인 활동에 있어서 그 의사결정은 장애인 당사자에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빤히 있는 당사자를 배제하고 활동지원사를 통해서만 소통하려는 비장애인들이 있다. 장애인들과는 직접적인 소통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건지 활동지원사의 역할이 그거라고 생각하고 그러는건지 그 내심은 알 수 없다.

이 달 초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함께 은행을 찾았을 때 창구 직원의 태도에는 장애인 당사자인 필자에 대한 무시뿐 아니라 활동지원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무례하기 그지 없었다.

전자 서명을 해야 할 때 마다 창구직원이 눈짓으로 자신에게 서명을 받으라는 식으로 지시했다며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은행을 나온 후 불쾌감을 토로하였다. 그뿐이 아니였다. 필자가 통장 잔액을 물었을 때에는 아무런 대답 없이 통장을 지원사 선생님께 건네는 것으로 대신했었다. 한마디로 이게 당신 일이니 당신이 하라는 식이다.

지원사는 장애인의 어려움을 지원하기 위함이지 비장애인이 장애인과 소통함에 있어서 거리감이나 불편함을 대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창구직원에게 잔액이 얼마 남았냐고 물었다면 그에 대한 피드백은 필자에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피드백에 있어서 도움이 필요할 경우 필자는 활동지원사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맞다. 이러한 행동은 장애인 당사자에게 뿐 아니라 활동지원사에게도 인격적 모멸감을 준다.

사소해서 혹은 그 경계가 모호해서 비장애인도 활동지원사도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활동지원사는 자신의 역할이 장애인을 돕는 것이라는 단편적인 직업의식으로 해당 장애인과 관련된 일이라면 지시의 주체와는 관계없이 당연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비장애인 역시 활동지원사는 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므로 지원사에게 요구하고 지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이가 많다.

실명 후 처음 활동지원사를 연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지원사 선생님이 센터에서 내 도장을 받아오라고 했다며 챙겨줄 것을 요구하셨다. 센터로부터 일말의 설명도 연락도 받지 못했는데 어째서 내 개인정보를 당사자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지원사에게 받아오라고 지시할 수 있는지 게다가 지원사는 그게 아무렇지 않은 듯 당연하게 여기고 따르는 건지 일반적인 상식으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센터에서는 필자의 항의 전화를 받고서야 자신들의 실수를 인지한 듯하였다. 그때 연계된 지원사 선생님은 결국 한달정도 밖에 함께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일상 여기저기에서 으레 당연한 것처럼 행해지고 있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었다. 필자가 대학생활을 할 때 단짝으로 지내던 지인이 활동지원사로 일하게 되었다. 그 지인은 필자와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고 그 만큼 시각장애인의 활동지원에는 자신이 있어서 시작한 경우였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 인격적으로 너무 모멸감이 느껴져 못하겠다며 활동지원사 일을 그만두었다.

지원 대상은 남성 시각장애인이었는데 장애인 당사자와는 별 문제도 없었고 오히려 진즉 그만두고 싶었는데 당사자의 부탁으로 몇 번을 참아냈다고 하였다.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어느정도 가사는 해야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은 산모를 대신해 갓 태어난 영아와 그 위 자녀 두명의 육아는 물론 식구들의 식사와 청소, 빨래, 요리 등 집안의 모든 가사를 도맡아 해야 했다고 그래도 신체적으로만 힘들었다면 참을 수 있었을텐데 그 와이프와 친정엄마는 자신을 마치 가사 도우미 대하듯 일말의 미안함이나 고마움 없이 당연히 해야하는 것처럼 집안의 모든 일을 시키고 지시했다며 자신이 장애인 활동지원사인지 가사 도우미인지 분간이 되지 않더라 하였다.

장애인의 일상 및 활동을 지원하는데 어려움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원사로서 그 직무외의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대하는 비장애인들로 인해 심리적인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비장애인 뿐 아니라 장애인들 중에서도 활동지원사의 역할을 잘못 이해하고 직무 외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또 어떤 이는 마치 자신이 월급을 주는 사람인 양 갑으로 행세하는 분들도 있다.

우리가 개인택시를 탄다고 그 사람이 개인기사가 아닌 것 처럼 활동지원사가 장애인 생활을 지원한다고 그들이 수행비서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제공받는 이용자이고 지원사는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서 그 보상을 국가로부터 받는 것이다.

현재 내 곁을 지키는 활동지원사는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용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 우리에게는 일상이지만 지원사에게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은 일터가 되며 엄연한 직업인으로 근로를 하는 것이다.

많은 시간 동안 물리적 정서적으로 가까워지게 되면 그 관계가 이용자와 제공자라는 관계에서 그냥 친한 사이로 그 경계가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활동에 있어서 장애인도 지원사도 활동지원사의 책임과 역할에 대해 항상 자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관계의 경계가 모호해짐으로 인해 그 역할과 책임마저 무너진다면 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서비스 이용자로서의 권리나 자기결정권을 침해받을 수 있고 활동지원사의 입장에서는 과도하고 무리한 요구로 인격적 모멸감을 느낄 수 있다.

이용자가 지원사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다면 과도하거나 직무외 활동에 대해 정중하게 부탁하게 되고 그 결정권은 활동지원사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행동함으로해서 지원사는 보다 더 자신의 직업에 긍지와 보람을 갖고 직업인으로서 존중받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활동지원사의 역할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비장애인들의 행동을 지적하기 전에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돌아보고 성찰해봐야 하지 않을까?

활동지원사를 대신해 나서서 비장애인에게 뭐라 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리가 먼저 지원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과 활동지원사는 서비스 이용자와 제공자로 관계를 맺지만 우리의 활동은 삼각 달리기처럼 각자가 아닌 파트너이자 동반자적 관계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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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칼럼니스트 9년 전 첫아이가 3개월이 되었을 무렵 질병으로 하루아침에 빛도 느끼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상자 속에 갇힌 듯한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나를 바라볼 딸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삐에로 엄마가 되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삐에로 엄마로 살 수는 없었다. 그것이 지워지는 가짜라는 걸 딸아이가 알게 될테니 말이다. 더디고 힘들었지만 삐에로 분장을 지우고 밝고 당당한 엄마로 아이와 함께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초중고교의 장애공감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2019년 직장내장애인식개선 강사로 공공 및 민간 기업의 의뢰를 받아 교육강사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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