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젖은 풀잎. @픽사베이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다. 고통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면을 설명하기 위함일 것이다. 시련이나 어려움을 견디고 나면 흙이 굳어 땅이 튼튼해지듯 사람도 이전보다는 더 강하고 튼튼한 사람이 된다는 말이겠다.

‘비온 뒤 굳어짐’이란 것이 감정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면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당연히 감정이 높낮이가 형성이 되겠지만, 일정한 시기에는 감정의 홍수를 경험하게 되고 내가 원하지도 않았고 뜻하지도 않았던 상황에 대한 분노로 거친 말들을 쏟아내기도 한다.

이런 삶의 위기를 경험한 사람들은 어떤 경우라도 심리적인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심리적으로 탄력성이 높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트라우마 사건을 경험할 때는 심각한 고통을 동반한다. 기본적으로 고통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수록 상황이 부정적일수록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가능성은 높아진다고 한다.

일전에 상담 진행을 위해 모 대학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대상자는 매우 상담에 방어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아내와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왔기에 이미 테이블 맞은편에 정면이 아닌 ‘삐딱하게’ 휠체어를 세우고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상냥한 웃음을 보이며 그에게 접근하여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사단이 났다. 척수장애인들의 경우 대부분 코드(code)환자다. 정확한 손상부위가 넘버링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손상코드로 의해 어느 정도 예후를 가늠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상담방향을 정할수도 있는 것이다.

그에게 ‘척수신경 몇 번을 손상 입으셨는가요?’ 이른바 코드를 물었으나 그는 알지 못했다. 자기가 척수신경 몇 번을 다쳤는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이라 이야기하면 될 것을 그는 오히려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여전히 익숙치 않은 휠체어를 어기적 밀며 병실로 돌아갔다. 도움을 주러 와서 욕먹는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가 싶기도 했지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그의 아내가 슬쩍 내게 와 이야기했다. 앞서 자신의 남편이 화를 낸 것에 대한 사과와 함께 척수손상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급히 전하고 사라졌다.

그녀의 말은 이랬다. 남편은 작은 굴삭기를 운전하는 사람이었고 혼자서 농수로 작업을 의뢰받아 작업 중 그 작은 굴삭기가 수로로 빠져 뒤집어졌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 과정에서 척수신경손상을 입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이 되어서야 다른 동료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밤사이 그가 느꼈을 공포, 죽을 수도 있다는 그 공포를 누가 알 수 있을까? 그 공포를 오롯이 견뎌내었던 그 밤은 그에게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란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밤사이 그에게 벌어진 고통의 크기를 나와 그 가족들에게 조금은 투박하게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과 고립감과 두려움에 노출된 그 긴 시간을 생각하니 그가 그렇게 밖으로 거칠게 표현하는 것이 이해되고도 남았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가진 사람들의 증상 중 하나는 두려움이다. 특히 그 두려움은 사건을 재경험하는 것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을 계속 떠올리게 만드는 일은 그에게 부정적이며 불쾌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는 것을 너무 가벼이 여겼던 것이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부정적 정서스트레스를 경험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들은 자신의 고통을 이해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친절히 자신에게 다가올지라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돕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앞서 만난 내담자처럼 그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이들이 마른 땅 같이 딱딱히 굳은 심정으로 일생을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비온 뒤의 푸르름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비온 뒤 푸른 대지 위에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비’가 꼭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는 거처럼, 우리 삶에 갑자기 끼어든 사건들에 대해 지금보다는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생각하면 전화위복의 삶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월에 딱딱히 굳은 마음은 버리고 비온 뒤의 푸르름을 보는 시각의 전환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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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칼럼니스트 한남대학교 내 한남장애인심리상담센터 부센터장으로 대학과 병원, 복지기관 등에서 강의, 집단 및 개인상담, 장애인식개선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2009년 심장마비 후 척수경색으로 인해 척수손상 장애인이 되었으나 ‘비갠 뒤 푸르름은 그 의미를 더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도 즐겁게 살고 있다. 교육학과 상담학 박사과정을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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