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기리는 노란 리본. ⓒ위키피디아

6년 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전라남도 진도 앞바다에서 선장, 선원이 아닌 세월호에 탑승했던 단원고 학생이 먼저 살려달라는 신고 전화가 119에 걸렸다. 배가 침몰하고 있으니 빨리 와달라고. 하지만 해경은 빨리 출동하긴커녕 사고지점 경위를 계속 따졌다.

이후 해경 구조대원들은 현장에 출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현장에 도착 전 세월호 선장은 승객들에게 “움직이지 마세요, 움직이면 위험합니다.”라고 방송했다. 30~40분 정도 지나 이들은 현장에 도착했지만 배 안의 승객들을 볼 수 없었다. 이들을 본 선장은 승객보다 맨 먼저 배에서 탈출했고 이어서 선원들도 탈출했다. 어이없는 상황인 것이다.

한편 구조대원들과 소통하는 수뇌부에서는 문자상황보고시스템으로 배에서 탈출하라고 대원들에게 명령할 것을 결정했지만 대원들이 탄 경비정에 그 시스템이 설치되지 않았다. 대원들은 수뇌부의 지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세월호와 교신하던 진도 해상교통관제시스템과 서해청 간에 선장의 퇴선 명령은 선장 재량대로 하라는 대화가 오고 갔다. 이러한 상황들로 인해 해경 구조대원들과 수뇌부, 세월호와의 소통은 너무도 잘 안 됐고, 결국 대원들은 승객들에게 배에서 빨리 나오라는 지시조차 하지 않았다.

10시 10분 정도 되어 실은 세월호가 바다 아래로 침몰해가고 있었으나 해경은 침몰상황을 축소하고 계속 구조 중이고 구조과정이 순조로운 것 같은 내용으로 지상파 언론들을 통해 알렸다. 내용과 논리가 이상했고, 피해자 가족들의 혼란은 커져만 갔다. 10시 30분,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 아래로 침몰했고, 304명의 생명들은 비참하게 수장되었다.

세월호 합창단 공연. ⓒ이원무

세월호 침몰과 관련해 정부는 단원고 학생들을 포함한 승객 304명의 생명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진상조사를 하며 정부에서 했던 일이 조금씩 밝혀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사 당일에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민들 비난이 두려워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유선으로 처음 보고한 시각을 허위로 조작한 공문서 만든 것, 국가 위기관리 컨트롤타워를 청와대로 규정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을 무단 변경한 혐의 등...

세월호 진상을 밝히기 위한 1기 특조위가 구성되었지만, 박근혜와 새누리당(현 미래통합당)은 추천한 특조위원들을 내세워 사퇴 협박까지 해가며 진상조사를 방해했다. 재판부도 박근혜의 7시간을 거짓으로 조작해 보고했던 전 고위 인사들에게 증거불충분 등의 이유로 무죄나 1~2년 형, 집행유예를 선고하는 등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것들을 보며, ‘이게 나라냐?’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박근혜 정부는 국민의 생명을 살리고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기본적인 책임과 의무조차 수행하지 않았다. 오히려 치부가 드러나는 게 두려워 자신들의 안위를 챙기기에 바빴다.

지금은 촛불혁명으로 정부가 바뀌어서 다행이지만, 그때 당시엔 국민들이 ‘이 나라에 왜 살지?’하는 의문이 들었을 거다. 그러면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고 싶었을 거다. 나도 묻고 싶어지게 된다.

염전노예 생활을 겪은 장애인의 편지가 경찰서에 있는 모습. ⓒYTN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같은 해에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시각장애를 겪는 염전 노동자가 “섬에 팔려가 도망갈 수 없으니 구출해 주세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어머니께 보냈다. 어머니는 이 편지를 경찰에게 넘겼다. 염전노예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다. 21세기에 노예가 있을 수 있냐는 반응이 나오며, 대한민국 전역은 발칵 뒤집혔다.

염전에서 일하는 장애인들은 노동 착취는 물론 폭언과 감금까지 당하며 10년 이상 오랜 세월을 보냈다. 염전에서 탈출하려 했지만 염주는 자신들 눈앞에 있었다. 쉽게 탈출하지 못하게 염전 노동자들에게 빨간 바지를 입혔다.

빨간 바지를 본 동네 주민들과 경찰은 염주에게 연락하기 일쑤였고, 아무런 보호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도 피해장애인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염전업주에게 되돌려보냈으며, 완도군 등의 지자체도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장애인에게 조치 내리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국가와 지자체가 피해장애인의 삶을 보호할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염전노예가 드러난 후 신안군의 여러 지자체에서 염전 여러 일대를 전수조사하기에 이르렀다. 피해자들이 구출되고 가해자들은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일이 벌어졌다.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거나, 가족 지원이 쉽지 않은 피해장애인의 숙식을 제공했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재판부의 이런 시각은 피해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보며, 권력의 불평등이라는 장애인 학대의 사회적 본질을 외면한 채 원인을 오로지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이기에, 장애인단체들이 모인 염전공동대책위원회(이하 염전공대위)에서 인권적 관점의 판결을 내리라고 재판부에 강력항의하기도 했다.

또한 공대위에서는 염전에서 일하는 장애인의 노동력 착취와 학대 등을 방치한 국가와 지자체에 책임을 묻겠다는 취지의 소송을 했다. 처음에는 재판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2심에서 원고 2명에게 각각 3000만 원, 1명에게 2000만 원의 위자료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에서 염전노예를 국가의 책임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국가와 지자체는 항소했고, 공대위는 여기에 대해 강력항의했다. 이후 판결에 법 위반 등의 특정사유가 없으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결정을 재판부에서 내리며 염전노예 국가책임 소송이 마무리됐다.

염전장애인 노예사건을 대표적인 장애인인권유린사건으로 다룬 제1차 장애인권리위원회의 대한민국 정부심의 때의 모습. ⓒ유엔인권정책센터

이외에도 사건이 터진 후 염전 사업주들이 피해장애인들에게 3년 치의 체불임금만 지급하는 일이 있었다. 이로 인해 노동력 착취가 오래될수록 배상금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권리구제를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민법과 근로기준법의 시효규정을 개정하라는 요구도 염전공대위에서 있었다.

염전노예 사건 처리 과정을 보고 들으며, 필자로선 국가가 풍비박산 난 장애인의 삶을 방치함은 물론 장애인이 노동 착취를 겪든 폭언을 당하든 별로 관심이 없음을 느꼈다.

염전노예 국가책임이 인정된 것은 다행이지만 아직도 염전노예와 비슷한 성격의 축사노예 사건 등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국가는 피해장애인의 삶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거의 방기한다는 생각이 든다. 피해장애인에게서 ‘이게 나라냐?’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국가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고 싶지 않겠는가?

2014년 갑오년, 장애인을 포함한 모든 국민들의 공분을 사게 한 세월호 참사와 염전 노예를 통해 필자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지 않으면 국가는 존재할 이유를 상실하게 됨을 강하게 느꼈다.

오늘 세월호 6주기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져 재판부에서 가해자들을 인권의 관점으로 판결하고 강력처벌해 국가가 국민 생명 보호 의무를 방기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장애인의 삶을 보호‧보장하는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 국가가 장애인을 권리의 주체로 보며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길.

마지막으로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이 질문을 다시 하며 글을 마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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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팝송 감상, 월드컵 등을 즐기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은 반백년 청년이자, 자폐성장애인 자조모임 estas 회원이다. 전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정책연구팀 간사였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을 위해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2번 심의를 참관한 경험이 있다. 칼럼에서는 자폐인으로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장애인권리협약, 장차법과 관련해 지적장애인, 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현실, 장애인의 건강권과 교육권, 접근권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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