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체어로 백사장 위를 달리기는 어렵다. 아내와 아이들만 뛰어올랐다. ⓒ정민권

공항을 빠져나가자 훅하고 축축한 공기가 달려들었다. 한국 여름 날씨에 익숙하지만, 그보다 다소 습했다. 새벽이 이 정도면 한낮의 코타키나발루는 도대체 얼마나 뜨거울까 하는 염려가 들었지만 살짝 들떠 진정되지 않는 기분에 금세 사그라들었다.

대기하고 있던 중형 밴에 올랐다. 코타키나발루는 연평균 기온이 우리나라 초여름 정도인 25~27도 사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간 시기(1월 중순)은 코타키나발루는 우기라고 하는데 천만다행으로 우리가 다녔던 일정 동안엔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았다.

15인승 콤비 정도 될까? 미리 장애인 동반이라 알렸던 터라 리프트를 살짝 기대하기도 했지만 예상했던 대로 없었다. 결국 두 동생들과 현지 운전 가이드까지 셋이서 무겁디무거운 나를 들어 올리듯 부축해야 했다. 덕분에 많이 힘들진 않았지만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 일정 내내 나와 휠체어를 올리고 내리고 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거다.

현지 코디네이터인 미미(왠지 오글거리는 이름이었다!)는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마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경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역사 강의가 펼쳐졌다. 인도네시아와의 관계, 코타키나발루의 지리적 위치와 도시의 특징들을 호텔로 가는 20분가량 마치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누른 것 마냥 쉬지도 않고 열강을 해줬다.

한데 우리는 낯선 도시의 냄새와 풍경에 들뜨긴 했지만 2시간이 넘는 탑승 대기와 5시간이 넘는 비행으로 지쳐 있어 미안하게도 집중하지 못했다. 게다가 난 심지어 어릴 적 앞쪽에 널찍한 엔진이 있던 시내버스를 탄 듯했다. 매캐하고 어지러워 멀미를 나게 하던 그 냄새를 40년이 지난 이곳 코타키나발루에서 맡게 될 줄이야! 그 냄새가 호텔로 가는 20분 동안 정신을 마구 흔들었다.

수영장에서 바라본 호텔과 화장실, 문이 독특했지만 굉장히 무거운 여닫이라 불편했다. ⓒ정민권

호텔은 비교적 시내 가까이에 있는 슈테라 하버 호텔이었다. 새벽이라고 해도 로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틀 후면 설날(중국 설 명절인 춘절도 음력 1월 1일이다.)이라서 그런지 로비는 온통 붉은색의 장식물들이 매달려 있어 자칫 중국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미미의 말을 빌리자면 코타키나발루, 아니 말레이시아라고 했던가? 어쨌든 "여기는 대부분이 중국 자본이어서 이슬람 국가임에도 중국 명절에는 온 도시가 붉은색이 된다."라고 했다. 음주 문화가 없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 국가에서 음주 가무가 일상인 중국 자본이라니.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저녁이 길다고 했다. 술 문화가 없으니 대부분 현지인들은 집에 일찍 들어가는 편이라고 한다. 조용한 거리가 우리 밤 문화와 사뭇 다르다. 소주 한 병이 한화로 1만 원 조금 넘었다. 그래서 겁나 진지하게 마셔야 했다.

말레이시아 돈 1링깃은 한화 300원 정도다. 환전은 국내에서 미리 해가지 않아도 된다. 가이드가 있다면 가이드에게 부탁해 시내 환전을 하면 환율이 더 좋다. 그리고 카카오 페이나 삼성 페이도 된다고 하긴 하지만 써보진 못했다. 시내버스는 1링깃, 그랩은 거리마다 다르긴 했지만 시내 정도는 20링깃 정도. 참, 코코넛 주스가 10링깃. 쇼핑 좀 해보겠다고 환전!

로비 한편에는 식당과 카페, 상점, 여행안내 데스크가 있다. 옷과 비치 제품이 진열되어 있어 기웃거리다가 어머니와 아내 뒤를 따라 들어갔는데 입구와 가장 가까워 눈에 띄는 진열대는 다름 아닌 한국산 사발면이 채우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까? 아니면 맛있어서? 아무튼 꽤나 놀라웠다. 그러고 보니 여행안내 데스크에도 큼지막한 한글로 홍보가 되고 있긴 했다. 호텔 직원이나 관광지 상인들에게서도 자주 한국말을 들었으니 한국 여행객들이 많긴 많은가 보다.

상점 옆으로 별도의 웨딩홀이 있어 구경 갔다가 장애인 화장실이 별도로 있어 살짝 신기했다. 한데 문은 엄청 무겁고 여닫이로 되어 있어 정작 휠체어 사용자에게는 꽤 불편했다. 그래도 국내 호텔도 별도의 장애인 화장실이 별로 없는데 코타기나발루에서 보니 새로웠다.

로비에서 미미에게 이런저런 안내와 다음 날 일정을 듣고 각자의 숙소로 찢어졌다. 방은 원룸 형태의 객실 하나에 화장실 하나. 침대는 더블과 싱글 익스트라 베드가 있다. 4인 가족인데! 착오가 있었는지 침대가 모자랐다.

너무 늦었으니 우선 더블에서 아내와 아이들이 자고 나는 익스트라 베드에서 잘 준비를 하는데 세상에 이 좋은 호텔 익스트라 베드가 라꾸라꾸 베드라니! 밤새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자장가였다. 호텔 매니저에게 말했더니 다음 날 베드가 하나 추가되어 좀 더 편안한 잠자리는 되었지만 삐거덕 소리는 이중창으로 울리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

숙소에서 보이는 바다와 수영장에서 연결된 바다. ⓒ정민권

그래도 시차가 거의 없어(2시간 정도) 그런지 개운한 아침을 맞았다. 영화에서만 보던, 화장실에 앉아 객실을 지나 창밖 바다까지 이어지는 막힘없는 시선 또한 백미라면 백미랄까. 게다가 커튼을 열자 요트가 떠 있는 파란 바다를 보는 기분이란, 정말 안 봤으면 말을 말아야 할 정도다. 제주도 바다와 다른 느낌은 바로 앞에 펼쳐진 에메랄드 바다와 요트에서 오는 걸까?

샤워실과 함께 사용하는 화장실은 엄청 넓지만 바닥이 대리석이어서 굉장히 미끄럽다. 변기나 샤워실 주위로 안전바가 없어 휠체어 사용자는 도움이 없으면 이용하기 불편한 구조이기도 하다.

세계 각국의 여행객이 있다기 보다 한국인 많이, 중국인 더 많이 있다. ⓒ정민권

그동안 연수며 교육을 다니면서도 조식은 당연히 포기하고 잠을 더 자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3일 내내 조식을 거르지 않았다. 음식 때문이라기보다 입구에서 몇 마디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외국인과 대화를 나눠볼 수 있다는 두근거림이 좋았다. 몹쓸 영어지만 울렁증이 별로 없는 편이라 되지도 않는 영어를 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 하나는 테라스 식당에서 바다를 보며 여유롭게 식사하는 호사스러움은 놓치기 정말 아깝다.

음식은 딱히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현지식보다는 빵류만 먹었다. 아침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입맛에 잘 안 맞았달까.

들고 다니며 책 한 권 다 읽고 왔다. ⓒ정민권

해외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영화나 책에 자주 등장하는 독서다. 책을 읽으며 낯선 이들 틈바구니에서 느끼는 이질감과 여유로움을 부려보고 싶었다. 그것도 폼 나게 한글로 된 책을 펼쳐 든다는 것은 한글을 하나도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한글로 된 책을 읽는 모습이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는데 드디어 그걸 해 볼 수 있었다. 이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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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일’을 하는 사회복지사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복지사. 책 읽고 글도 쓴다. 그리고 종종 장애인권이나 인식개선을 위한 강연도 한다. 미디어에 비친 장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장애당사자로서 일상에서 겪는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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