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 before you speak, read before you speak(말하기 전에 생각하고, 말하기 전에 읽어라)이미지. ⓒunsplash.com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2018)’라는 책머리에는 지하철 2호선에서 만난(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작가가 귀와 눈으로 만난) 한 할머니와 손자와의 대화가 나온다. 책에서 언급한 대화의 내용과 상황은 대략 이렇다.

지하철에 탑승한 할머니와 손자. 할머니의 손에 약봉지가 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병원에 다녀오는 듯했다. 할머니는 손자의 이마에 손을 얹고 웃으며 말한다.

“아직 열이 있으니 저녁 먹고 약을 먹자” 손자는 할머니의 따스한 진단에 대답하고 이내 묻는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내가 아픈 걸 잘 알아요?”라고. 할머니는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안다’, ‘할머니는 다 알지’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대답은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이 그 마음을 안다는 말이다. 겪어 본 사람은 상처가 남기는 아픔도 상처가 주는 흉터도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격어보지 못해서 일까? 얼마 전, 아주 따뜻한 이야기에 온도를 더해 ‘열 받는 이야기’를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마음은 불편하지만, 어쨌든 요즘 연일 집권 여당 대표의 부적절한 언행으로 인해 장애계 뿐 아니라 정치계가 매우 혼란스럽다.

“선천적 장애인은 어렸을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나와서 의지가 약하다”라는 실언을 한 여당의 당 대표는 당황한 듯 연신 언론을 통해 사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어 1월 16일 신년기자간담회에서 사족을 붙이길, ‘의도 없이’, ‘무의식’으로 인한 발언이었다고 밝혔다.

사람의 내면과 무의식, 잠재의식은 상호 뗄 수 없는 관계다. 본인이 무의식의 결과물이라 말할지라도 이미 의식적 행위를 통해 밖으로 쏟아져 나와 버린 것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그 본인에게 있는 것이다.

여기서 책임이라는 것은 앞으로 사람들의 인식에 ‘장애인 비하 발언 당사자’라는 오명을 안고 정치할 책임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란 뜻이다. 더군다나 이번 한 번이 아니라, 지난해 12월 전국 장애인위원회에서 이미 ‘신체장애인 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이라 말해 구설에 올랐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쯤 되면, ‘상습이고, 상습이면 가중처벌’이 되는 것이 일반적인 법 적용 방식이다. 어쩌면 법이 아니더라도 심정적으로 이 대표는 장애당사자와 가족에게 ‘찍혀도 제대로 찍힌 셈’이다.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을 가진 나로서는 늘 느끼는 것이 ‘사람이 잘 안 바뀐다’는 것이다. 안 바뀐다는 것이 좋은 의미로 쓰일 때도 있겠으나 때로는 같은 이야기를 수차례 반복해도 똑같은 잘못을 판박이처럼 똑같이 저지르는 것을 목격할 때가 자주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그의 사과와 재발 방지에 대한 약속은 어쩌면 이미 받아도 쓸데가 없고 받아주지도 않을 공수표를 장애계에 던진 셈이다.

소통전문가 홍석고 박사가 쓴 <불통이 불만입니다>라는 책에 보면 하버드 대학교의 위건(A. E. Wiggan)교수의 글이 눈에 띈다. 교수는 가정, 사회, 직장생활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그 결과 전문지식이 부족해서 실패했다고 대답한 사람은 불과 15%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85%는 인간관계를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미국의 카네기재단은 5년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 약 1만 명을 대상으로 ‘성공의 비결’을 물었다. 그 결과 앞서 위건 교수가 조사한 내용과 동일하게 약 85%가 인간관계를 잘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명성과 부를 이룰 수 있었다고 응답했다.

나머지 15%는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 성공했다고 대답을 했다. 어쩌면 대부분의 장애인 비하와 구설은 장애와 장애계와의 불통이 낳은 결과물인 것이다.

사람은 관계의 생물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는 듣는 것보다 만나고 경험하면서 상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고 이해할 때 더욱 풍성해진다.

가끔 ‘장애를 책으로 배운’ 사람들은 종종 장애를 대상화를 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대상화는 나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 물건이나, 인간미 없는 사물의 형태 또는 시혜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소통이 없으면 대상화는 더욱 심각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대상화 시키지 말고 내재화 시키려면 경험이 동반되어야 한다. 경험을 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도 많다. 그것이 장애와 관련된 것이라면 예외는 아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될때 마다 드는 생각은, 정치인들 사회지도층의 장애인에 대한 비하 또는 말실수가 있을 때 그들에게 장애인센터, 장애인복지관 등에서 ‘장애현장사회봉사명령’ 의무로 이수하는 법안을 누가 발의 안하나 이다. 누가 좀 그리 해주길 바란다.

사족을 덧붙인다면, 집권 여당의 대표께는 본인이 장애를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대상을 좀 더 이해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싶다. 어쩌면 ‘또 노오~력 이냐?’라고 말하는 이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장애인이 돼보라’, ‘아주 큰 아픔을 경험해 보라’, ‘그 가족이 되라’, 말할 수는 없으니. 소통을 위해 더 노력하시라 말씀드리고 싶다. ‘소통의 출발점은 누가 써 놓은 글이 아니라 진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모르는 이 ‘비밀상식’을 모르신다면 최근 입당하신 ‘의지가 강하신 가까운 분’에게 꼭 문의하길 바란다. 그렇게라도 간접경험을 꼭 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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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칼럼니스트 한남대학교 내 한남장애인심리상담센터 부센터장으로 대학과 병원, 복지기관 등에서 강의, 집단 및 개인상담, 장애인식개선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2009년 심장마비 후 척수경색으로 인해 척수손상 장애인이 되었으나 ‘비갠 뒤 푸르름은 그 의미를 더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도 즐겁게 살고 있다. 교육학과 상담학 박사과정을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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