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년 7개월 전, 2018년 6월, 축구 관람을 좋아하는 필자는 러시아월드컵을 보기 위해 바르샤바, 모스크바를 경유, 카잔에 도착했다. 카잔에서 우리나라와 독일의 월드컵 F조 예선 마지막 경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멕시코가 2승, 독일과 스웨덴이 1승 1패로 공동 2위, 우리나라가 2패로 최하위였다. 멕시코가 스웨덴을 이기고 우리가 독일을 2점 차 이상으로 누르면 산술적으로 16강 진출 가능성이 있었으나,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왜냐면 당시 독일은 브라질월드컵 디펜딩 챔피언이자 자타공인 세계최강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 자신도 한국의 3패를 마음속에서 기정사실로 인정했고 이는 카잔행 기차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던 관광객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그래도 망신당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무승부만이라도 거두기를 바라는 실낱같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도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6월 27일, 카잔 크레믈린 주변을 돌아다니다 경기 시작 직전 독일과의 마지막 F조 예선이 열리는 경기장에 도착했다. 카잔 아레나에는 독일과 중국에서 온 팬들이 상당히 많았고 우리나라에서 온 붉은 악마와 현지 교민들은 극소수라 대표팀은 응원 면에서 불리함을 안고 경기에 임했다.

카잔 아레나로 향하고 있는 축구팬들. ⓒ이원무

전반전에는 서로가 그다지 위협이 될만한 장면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다만 정우영 선수가 얻어낸 프리킥을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Manuel Neuer) 골키퍼가 놓치자 손흥민이 다시 볼을 잡아 슛을 날리려 시도했지만 그게 무산되었던 순간을 제외하곤 말이다. 그래도 독일이 볼을 잡으면 조직적인 패스로 움직이기에 골을 허용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계속 들곤 했다.

후반전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의 킴미히(Kimmich)가 찬 공이 고레츠카(Goretzka)의 머리에 연결돼 헤딩슛으로 이어졌지만 조현우 골키퍼의 수퍼세이브로 위기를 모면했다. 얼마 뒤 마르코 로이스(Marco Reus)와 메수트 외질(Mesut Ozil)의 연계 패스로 연결된 공을 티모 베르너(Timo Werner)가 찼지만 살짝 빗나갔다.

이렇게 독일이 우세하게 경기를 이끈 장면들이 훨씬 많았다. 한국보다 패스, 코너킥이 각각 평균 3.3배, 3배였으니 말이다. 골 허용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상대 선수의 공격을 막으려 온 몸을 던졌고 골키퍼도 슛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최선을 다하려는 몸부림이 느껴졌다.

독일전 경기장면 중 하나. ⓒ이원무

경기가 거의 끝날 무렵 0-0, 독일 선수들에게서 초조함이 느껴졌다. 우리 선수가 찬 공이 독일 선수 맞고 골라인 바깥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코너킥으로 이어졌다.

손흥민이 찬 공이 독일 선수의 발을 맞은 게 김영권에게 연결되었고 그가 찬 공은 골망을 흔들었다. 그런데 오프사이드로 선언되었다. 얼마 후 심판은 신호를 받은 듯 하더니 VAR(비디오 판독)을 하겠다고 했고 그 장면을 다시 봤다. 오프사이드가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고 골 선언을 했다. 1-0! 믿기 힘든 순간이 시작되었다.

김영권의 골이 득점으로 인정되는 순간. ⓒYoutube, FIFA

이후 독일은 더 급해졌고 슛을 날렸지만 무위로 끝났다. 마누엘 노이어 골키퍼까지 동점골을 얻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섰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골키퍼가 찬 공을 주세종이 가로챘고 그는 이 공을 달려드는 손흥민에게 연결했다. 손흥민은 무방비 상태인 독일 골망을 갈랐다. 2-0!

이후 독일 측의 파상공세가 이어졌지만 골 운이 따르지 않았다. 주심 휘슬이 울렸고 한국은 월드컵 예선에서 독일을 탈락시킨 최초의 팀이 되었다. 승리할 것이란 기대를 일도 하지 않았고, 무승부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경기를 관람했던 나로선 역사적인 기적을 보며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기 후 독사진(좌측), 팬들과 함께(우측). ⓒ이원무

얼마 후 외신에서는 독일의 패배에 대해 비판했다. 월드컵 시작 전 터키계인 메수트 외질과 일카이 귄도간이 터키 대통령과 함께 사진 찍은 것을 두고 독일 선수단 내 다른 선수들이 이들에게 사과를 요구했지만 당사자들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독일 선수인 제롬 보아텡과 토니 크로스로 대표되는 파벌이 등장하며 독일축구대표팀 팀워크 분열로 이어졌고 이게 한국전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는 거다.

독일 국민들도 경기 종료 직후 선수들 플레이가 엉망이었고, 하나의 팀으로 뭉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그 당시 나랑 같은 방을 썼었던 독일 관광객도 승리를 축하하며 한국이 이길 자격이 있었고 독일은 팀으로서 하나가 된 플레이를 펼치지 못했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리 개인 역량이 뛰어나도 팀으로 뭉치지 못하면 진다는 것을 독일 선수들을 통해 다시금 느꼈다. 반면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우리 대표팀은 개인 역량에서는 독일에게 밀렸지만 승리에 대한 의지로 원팀으로 똘똘 뭉쳐 독일보다도 더 많은 거리를 뛰었고, 이게 결국엔 역사적인 승리를 만들어낸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이런 카잔의 기적이 있기 2년 전, 우리나라에서는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다. 총선거 결과 당선권 내 장애인 비례대표 전무! 장애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4년 전 한국장총, 장총련 공동주최 장애인 아고라 '우리의 정치참여를 위한 대안은?'을 듣고 있는 청중 모습(좌측), 아고라 진행하는 토론자들 모습(우측). ⓒ에이블뉴스DB

이에 대해 장애계 내에서 원인을 분석했고 결과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장애인 비례대표들이 전 장애계 의견을 모으지 않으며 각개전투를 했다는 것

2) 비례대표에서 장애인이 한 자리는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장애계의 안일함과 오만함

3) 장애인 총선연대 목소리가 하나로 뭉치지 않고 분열된 것 등등.

장애인 비례대표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장애계의 분열이 있다 보니, 정치인들은 장애계, 장애인들을 우습게 보았을 거고, 결국엔 당선권 내 장애인 비례대표 전무라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국회 내의 장애인 정치세력은 많이 약해졌고, 이는 정치인들의 장애인 비하․혐오로 이어지는 빌미를 제공한 원인 중 하나라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그래서 장애계도 정치인의 장애인 비하 사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정당들이 장애 당사자들을 영입인재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장애인 비하발언이 계속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장애인을 당당한 정치 주체로 보지 않고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구태는 여전하다. 장애인의 정치세력화가 중요하다는 정치권 발언은 그저 립서비스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장애인자립생활센터총연합회 등의 3개 단체가 21일 국회 앞에서 정치인의 장애인 비하 규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에이블뉴스DB

올해 4월,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다. 총선을 대비해 전장연 등은 장애인 공약을 마련하고 총선연대를 꾸렸다. 한국장총 등의 단체들은 자신들이 만든 장애인정책종합계획 제안서가 반영이 잘되지 않을 것 같다고 하면서 국회의원 총선공약 마련과 총선연대 구성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물론 장애계 내의 단체마다 장애계 요구공약, 총선연대 구성과 관련, 입장 차가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나름대로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니 말이다.

하지만 장애계가 합심하고 단합하는 모습으로 장애인의 진정한 목소리를 하나로 낼 수 있는 구심점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정치권이 장애인과 장애계를 시혜와 동정으로 바라보며 립서비스 하는 지금의 상황을 볼 때 4년 전의 당선권 내 장애인 비례대표 전무 등과 같은 참담한 결과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이제라도 장애계는 뭉치고 단합해 장애인이 다양하면서도 하나 된 목소리를 강력하게 내어 정치권을 압박하도록 구심점을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추후 장애 당사자 국회의원들이 선출될 경우 이들은 정책역량을 강화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4년 전의 참담한 결과는 앞으로도 반복될지도 모른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이 단순하고도 중요한 명제를 장애계는 기억하며 이번 총선에 임해주길 당사자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서 장애인 피선거권이 살아 숨쉬는 법적 권리로 자리매김하며 장애인의 정치활동 활성화와 인간다운 삶이 현실로 다가오는 계기가 될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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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팝송 감상, 월드컵 등을 즐기고 건강정보에 관심이 많은 반백년 청년이자, 자폐성장애인 자조모임 estas 회원이다. 전 한국발달장애인가족연구소 정책연구팀 간사였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정부심의 대응을 위해 민간대표단의 일원으로 2번 심의를 참관한 경험이 있다. 칼럼에서는 자폐인으로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장애인권리협약, 장차법과 관련해 지적장애인, 자폐성장애인과 그 가족이 처한 현실, 장애인의 건강권과 교육권, 접근권 등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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