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정치인의 ‘선천적 장애인’을 운운하는 망발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하다하다 이젠 장애를 선천, 후천으로 가르는구나, 어떤 한 개인의 의지력을 추켜세우는데 무슨 선천, 후천이 필요할까.... ’ 울분이 훅! 올라왔습니다.

뭐, 나한테는 ‘선천적 장애인’인 아들이 있으니 ‘심리학적’으로(그 정치인이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듯해서 스스로 분석해 보니) 자격지심이 발동한 것이라 차치하더라도, 그것은 무개념에서 뱉어낸 공직자에 대한 신의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선천적이라는 의미를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통념적인 개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구분해 보면, 생물학적으로는 ‘선천적’이란 본래부터 타고 났다는 것을 뜻하고 ‘후천적’이라는 것은 경험이나 환경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다른 학문인 철학에서의 의미는 발생적인 순서의 의미가 아닌 논리적인 선·후(원인과 결과를 추리하는 방향에 따라)라고 합니다. 또한 심리학에서는 인식의 보편타당성을 부여하는 인간의 주체적인 인식작용을 선천적, 후천적이라고 말합니다.

학문적 정의야 어찌되든 좌우지간 그 정치인의 선천적 장애라는 단어는 분명 ‘생물학적 정의’를 담고 있음이 틀림없었습니다.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경우는 분명 생물학적인 선·후 배경은 존재합니다만 뒤에 오는... 그래서 의지가 약하다, 강하다는 표현은 선천적 장애라는 주어의 서술이 될 수 없습니다.

왜? 생물학적 논리에 심리학적 논조를 적용하는 것일까요? 그 정치인이 말한 어느 심리학자에게 들었다던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라는 그 이야기는 분명 주어가 다른 어떤 학술적 이론이 변질된 중간낭설이 주작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우리 몸의 모든 구성은 다 가지고 태어난 것이지요. 어디 살다가 필요하다고 눈 하나 더 달고, 마음에 안 든다고 어느 곳 하나 없애고 그러지는 않지요. 개인의 고유성이 성격이 되고 특성이 되고 개성이 됩니다. 거기에 교육을 받고 학습과 경험을 통해 더 발전된 모습으로 성숙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이상향일 것입니다.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구요? 그럼 ‘선천적 홑꺼풀의 눈’은 의지가 강할까요, 약할까요? ‘선천적 단신’은 의지가 약할까요, 강할까요? 성형 수술을 해서 쌍꺼풀을 만들고 정형 수술로 키를 늘리면 뭐. 뭐 애당초 ‘선천적’으로 약했던 의지가 파워 뿜뿜의 슈퍼맨이 된답디까?

‘의지’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모양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고유성과 개인이 노력한 학습효과라고 정의되어야 합니다.

‘장애’와 ‘홑꺼풀’과 ‘단신’의 비유는 다소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그만큼 ‘장애’는 이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부분이며 개인의 개성이라는 말은 하고 싶은 것입니다. 변화무쌍 다변의 이 시대에 아직도 ‘장애’에 대한 인식이 고작 형식적인 모양새로 귀결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차별에 씁쓰레합니다.

이보시오, 우리 모두의 몸뚱이는 그저 미토콘드리아의 덩어리가 뭉쳐져 있는 ‘선천적’인 내림일 뿐 그것이 훌륭하다, 나쁘다, 부족하다의 평가 잣대는 될 수 없다는 것이 만고의 진리올시다.

어디 한번 ‘선천적 장애인’인 내 아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한번 만나보시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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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칼럼니스트 발달장애화가 이규재의 어머니이고, 교육학자로 국제교육학회에서 활동 중이다. 본능적인 감각의 자유로움으로부터 표현되는 발달장애예술인의 미술이나 음악이 우리 모두를 위한 사회적 가치로 빛나고 있음을 여러 매체에 글로 소개하여,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며 장애인의 예술세계를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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