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한 장면. ⓒ구글무비 캡쳐

1967년에 개봉한 헐리웃의 영화 가운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Guess Who’s Coming to Dinner?)‘이라는 영화가 있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시드니 포이티어와 캐더린 햅번이 주연한 이 영화는 백인 가정의 딸이 흑인(흑인이라는 용어가 차별적 언어라는 의식에 따라 최근에는 미국에서 태어난 아프리카 혈통의 흑인들을 아프리칸 아메리칸(African Americ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아프리카 혈통이 아닌 흑인들은 아프리칸 아메리칸에 해당이 되지 않아 모든 흑인들을 부를 수 있는 용어는 아니다.) 남자를 부모님께 소개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무겁지 않게 다룬 인종차별에 대한 영화이다.

부모는 딸의 갑작스런 결혼 선언과 그 상대가 흑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그걸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화와 태도에는 인종차별이 깔려있다. 이 영화의 원제인 ‘저녁 만찬에 누가 올까’보다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는 우리나라의 영화 제목이 훨씬 더 이 영화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초대받은 손님은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럴 때 우리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며 손님을 맞는다. 그러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 즉 불청객은 불친절한 대우를 받는다. 입 밖으로 말은 꺼내지 않아도 마음속으로 “왜 왔어?”라고 생각을 한다.

당연히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지 않는다. 이럴 때 우리는 “왜 왔어요?”라고 묻거나 차마 직설적으로 왜 왔냐고 묻기 어려운 경우에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는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오셨어요?”는 “왜 왔어? 네가 올 곳이 아니야, 빨리 가!”의 간접 표현이다.

1960년대 미국 사회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흑인이었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장애인이다.

필자는 지금도 처음 가는 음식점이나 상점에 들어갈 때, “어서오세요”라는 환영의 인사보다는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다. 심지어 병원에 갔을 때조차도 간호사들이 난처한 눈빛으로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을 때는 너무나 당황스럽다.

병원에서 “어떻게 오셨어요?”는 보통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의 의미이지만 내게 던져지는 “어떻게 오셨어요?”는 “이곳에 무슨 일이시죠?”의 의미였다. 처음 가는 음식점에서는 열에 아홉은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질문한다.

난처하고 귀찮다는 눈빛으로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 기분이 좋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는 “식당에 식사하러 왔지, 왜 왔겠어요?”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하지만 “어서오세요”라는 말보다 “어떻게 오셨어요”라는 말에 지쳐있는 날에는 나도 대답이 곱게 안 나온다. “손님이 오면 어서오세요라고 해야 하는거 아닌가요?”라고 따지게 된다.

이렇게 일차 탐색전이 끝나면,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었던 상대방도 겸연쩍게 “아...네...”하면서 자리를 안내하기도 하지만, 간혹 “지금 복잡한데....”라며 자리가 없다는 듯이 말을 하며 눈치를 살피는 경우도 있다. 나가달라는 표현이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식당에 정말 빈자리가 없거나 복잡했던 적은 거의 없다.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간접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대놓고 나가라는 식당도 허다하다. 한번은 자주 가던 분식집에 점심시간에 맞춰 간 적이 있다. 그 분식집의 라면이 내 입맛에 맞아서 몇 번 갔던 곳이어서 내 딴에는 단골이라고 생각하며 점심시간에 찾아간 것이 불찰이었다.

평소에는 잘 맞아주던 주인이 날 보자마다 손을 휘저으며 “지금 오면 안돼!”라고 했다. 평소에는 12시 반쯤 손님이 한차례 빠져나갔을 때쯤 갔었는데, 그날은 배가 고파 12시에 갔고, 주인은 한참 손님을 받을 시간에 내가 들어오면 자리가 좁다고 생각을 했는지 안된다며 다음에 오라고 했다. 물론 그때도 자리는 있었다. 지금 오면 안 된다는 말은 손님이 많을 때 오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는 점심시간은 장애인에게도 비장애인에게도 똑같다는 점이다. 지금도 그때 주인의 얼굴과 지금 오면 안돼라는 말이 또렷히 기억이 난다. 더 충격이었던 것은 지금 오면 안 된다는 것과 ‘안돼’라고 반말을 했다는 것이다.

또 한 번은 퇴근길에 집 앞에 있는 순대 볶음 집에 갔다. 그 집은 드물게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고, 또 몇 번 포장 주문을 했었기에 나름 안면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안심한 것이 불찰이었다.

문이 열려 있어서 경사로를 통해 안에 들어가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일하는 분이 나오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가라고 손을 내저었다. 저녁이라 손님이라고는 다른 테이블에 한 팀, 그리고 포장을 기다리는 손님밖에 없었는데도 무조건 나가라고 했다.

내가 “자리가 있는데, 손님을 내쫓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졌지만, 막무가내로 나가라고 했다. 결국 쫒기듯이 그 곳을 나와야 했다. 이 두 사건이 모두 2019년 한국의 서울에서 있었던 일이다. 물론 나는 그 두 곳을 다시 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일이 식당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며, 필자만이 겪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30년 전에도 식당에서 나가 달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장애인에 대한 거부는 우리 사회만의 문제도 아니다. 필자는 영국이나 일본 등 해외에 가서도 장애인이라고 나가 달라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장애에 대한 거부는 차별의 가장 대표적인 형태이다. 30년 전에는 구걸하러 왔느냐며 나가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로 나가라고 한다.

그것은 ‘장애인이 낯설어서’라는 고상한 이유가 아니다. 장애인에 대한 뿌리 깊은 거부는 장애에 대한 혐오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혐오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장애인에게 “어서오세요”가 아닌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묻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필자가 장애 차별, 특히 거부의 원인을 장애에 대한 혐오로 보는 이유는 단순히 낯설기 때문에라고 보기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1990년대부터 전동휠체어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었고, 장애인의 사회활동도 활발해졌다.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장애인이 나가기도 하고, 대통령과 국민과의 대화에도 장애인이 대부분 참여한다. 더 이상 장애인은 예전처럼 낯선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거부는 여전하다. 자리가 없다, 비좁다, 다른 손님들에게 불편을 준다 등 많은 이유를 이야기하지만, 그 밑바닥에 있는 속마음은 장애인이 싫고 장애인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특수학교가 들어선다고 하면, 주민이 단결해서 반대를 한다. 그렇게까지 반대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장애에 대한 혐오가 바로 그 이유이다.

그럼 장애에 대한 혐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혐오의 원인을 분석하여 그 원인을 뿌리 뽑는 것이 제일 좋지만, 우선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장애에 대한 혐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혐오가 심각한 인권침해이며, 차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장애인을 열렬히 환영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왜 왔느냐며 거부는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그 거부가 차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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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융호 칼럼니스트 장애물없는생활환경시민연대 사무총장,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집행위원장, 서울시 명예부시장(장애)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사단법인 한국환경건축연구원에서 유니버설디자인과 장애물없는생활환경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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