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을 긁적이고 있는 시준. ⓒ최선영]

'차은혜, 차은혜, 차은혜...'

시준의 손에 붙들려 몸을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펜은 연신 차은혜를 내뿜고 있다.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디선가 잔잔하게 들리는 훌쩍거림에 펜을 든 시준의 손이 일시정지되었다.. 펜을 내려놓은 시준은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대신 훌쩍여주는 그 소리를 찾기 위해 두리면 거리기 시작했다.

그 흐느낌의 주인은 옆 바로 앞 칸에 고개를 숙이고 웅크린 체 앉아있었다. 가녀린 어깨가 떨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놓아도 더운 여름날 그녀의 몸은 서리를 맞은 듯 추워 보였다. 작은 몸짓에서 조심스레 새어 나오는 그녀의 흐느낌은 시준의 귀를 아프게 두드렸다. 마음이 눅눅하게 젖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이 저렇게도 슬프게 했을까..."

잠시 잊고 있던 시준 안에 있는 더 큰 눈물을 꿀꺽 삼키며 흔들리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펜을 들었다.

'차은...'

시준은 더 이상 그 이름을 쓸 수가 없었다. 눈에서 툭-하고 떨어진 눈물이 은혜를 가렸다.

흩어지는 그녀의 이름들이 마치 너덜너덜해진 시준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차은혜로 가득한 종이를 찢어내고 들고 있던 펜도 가방에 던져 넣었다. 쿡-처박힌 펜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차은혜를 기억하는 모든 것을 그렇게 버리고 싶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시준. ⓒ최선영

차은혜를 그리워하고 원망하고 버리는 동안 시준을 태운 기차는 멈춰 섰다. 기차에서 내리려다 말고 대각선으로 보이는 그녀를 보았다. 웅크리고 있던 어깨는 펴졌지만 여전히 슬픈 등이었다.

그녀도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앞을 볼 자신이 없어서 기다렸다. 그냥 그 뒤를 따라가고 싶었다.

잠깐 외출하는 차림의 그녀는 작은 백팩 하나 달랑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어지러운 듯 살짝 휘청거리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기차에서 내렸다.

작은 가방 안에 큰 상처를 꾹꾹 눌러 담은 것처럼 그녀의 뒤 모습은 많이 무거워 보였다. 조금은 신경이 쓰였지만 타인에 대한 작은 걱정도 시준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지금 내가 누구를 걱정하는 거지..."

시준은 조금은 안쓰러운 그녀를 그곳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먼저 빠져나왔다.

"차은혜를 버리고 가자."

시준은 은혜를 처음 만난 이곳에서 은혜와의 모든 기억을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은혜와 함께 했던 모든 곳을 혼자 했다. 가는 곳마다 은혜의 미소가 보였고 그 짙은 흔적들이 시준의 마음을 찔러댔다.

면도도 하지 않고 하루 한 번 쓰러지지 않기 위해 겨우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밀어 넣으며 차은혜 지우기를 실천했다. 일주일이 지나고 휴가도 끝이 보였다.

"내가 여기서 뭘 한 거지?"

은혜를 지우고 버리겠다고 온 이곳에서 시준이 받아든 건 은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원망과 미움이 가득한 자리에 지우고 버리고를 위해 그녀와 함께 한 이곳에서 시준은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채우고 돌아간다.

돌아가는 기차에서 시준은 다시 그녀를 만났다. 좌석표를 확인하며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창가 쪽에 앉은 그녀.

초췌한 그녀의 모습에 지난 일주일 동안 힘들었던 건 시준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했다.

일주일 전 차림 그대로인 그녀의 앞모습은 여전히 슬퍼 보였지만 시준과는 다른 빛깔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반을 말없이 그녀의 숨소리만 들었다. 조용히 멀어지는 그녀의 뒤 모습을 보며 단단하게 잘 살아내기를 말없이 응원해주었다.

유안을 다시 만난 시준 ⓒ최선영

그리고 6개월 후,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회사 동료의 제안으로 장애인과 저소득층 청소년들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봉사를 시작하려고 갔던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6개월 전, 슬픔으로 젖어있던 그녀가 맞나 싶을 만큼 그녀의 모습은 햇살처럼 빛나고 있었다.

바이올린 전공을 하고 지금은 방과 후 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한다는 그녀는 그곳에서 누구보다 밝은 모습으로 장애청소년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유안, 그녀의 이름이 시준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시준은 유안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며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은 내 안에 행복을 만드는 아름다운 행위라는 것을 느꼈다.

행복을 채우며 1년을 함께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시준은 유안에게 그날을 이야기했다.

"그때... 유안 씨 봤어요."

"기차에서..."

"어~유안 씨도 저 봤어요?"

"네... 뒤에서 계속 펜 긁적이는 소리가 서걱거리며 났어요. 그리고 바닷가에서 혼자 술 먹고 울고 있는 것도..."

"아... 이런,"

"괜찮아요. 제 모습도 다 보셨잖아요..."

시준이 사랑했던 은혜는 시준보다 더 조건이 좋은 남자를 선택하고 시준을 떠났다. 3년을 만났고 결혼한다면 늘 은혜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준과 달리 은혜는 결혼이라는 선택의 순간이 오자 시준을 떠났다.

그녀를 지우고 버리기 위해 시준은 그곳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시준의 시선을 끌었던 유안이 훌쩍이던 그날은 1년 전 교통사고로 곁을 떠난 현석의 기일이었다.

현석과 캠퍼스 커플이던 유안은 회사 동료들과 워크숍을 다녀오는 길에 사고로 떠난 현석을 만나기 위해 그와 함께 했던 그곳으로 갔다.

시준은 잊기 위해, 유안은 다시 기억하기 위해. 서로 다른 이유로 그곳으로 여행을 갔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다시 만났다.

1년이 지나도 여전히 현석을 잊지 못하는 유안에게 교회 언니는 봉사활동을 하자고 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유안은 이곳에서 음악을 지도하며 아이들의 밝은 미소에 현석을 잃은 아픔을 치유받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게 사람들이 말하는 인연이 아닐까요?"

"인연..."

"네.. 그 누구에게도 제 마음을 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유안 씨를 이곳에서 다시 보며 제 마음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어요."

그 누구도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시준과 유안은 뜻밖의 장소에서 다시 만나고 함께 봉사활동을 하며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지금은 내일을 약속한 사이가 되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시준과 유안 ⓒ최선영

장애인과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음악을 지도하는 봉사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타인의 권유였지만 이 시간들을 통해 더 큰 위로와 행복을 채워가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알게 된 이들은 부부가 되어서도 이 행복을 이어갈 것이라고 환한 미소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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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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