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을 아끼는 배범준(23세)과 오빠를 지키는 여동생(20세)이 함께 촬영 하는 모습. ⓒ김태영

“왜 오빠한테 안 물어봐?”

“엄마, 언니 오빠들은 다 칭찬해 주면서 나랑 오빠는 왜 안 해줘?”

“엄마는 오빠가 해 달라고 하면 다 해 줄 거지?”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느냐’란 말에 안 깨물거나, 깨무는 시늉을 하거나 덜 깨물면 안 아픈 것 아니냐고 했던 나의 사춘기가 있었듯이 내게 듬직하고 고마운 딸아이가 송곳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었다.

두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는 학교와 서너 곳의 교육센터에서 역사와 세계사를 강의했었다. 교육 대상의 눈높이에 맞춰 역사의 흥미를 위해 즐거운 주책을 맘껏 발산했다. 수업이 마무리 될 때쯤 학생들은 그날의 주요 내용을 대답해야만 귀가하도록 했더니 그것이 싫었던 학생들이 지어준 짓궂은 별명들을 나는 좋아했다.

차례가 점점 가까울수록 긴장이 가득한 아이들의 눈망울은 한없이 귀엽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며 말하는 모습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70여명의 학생들이 모두 끝나갈 즈음 맨 마지막에 서 있던 범준이도 열심히 외운 것을 말하려고 할 때 나는 “가방 정리해. 이제 가자”라고 했다.

3~4시간 이어서 강의를 하다 보니 녹초가 되었다. 그러기를 몇 주를 반복하자 7살 딸아이가 까랑까랑하고 또랑또랑하게 내게 따져 물었다.

“왜 오빠한테는 안 물어봐? 오빠가 얼마나 열심히 외웠는데, 나랑 질문하고 대답하고 연습도 했단 말야! 그리고 왜 우리는 맨 날 맨 마지막이야? 우리도 일찍 와서 줄 섰는데 왜 뒤로 가래?”

어린 딸아이의 볼멘소리에 나는 부끄러웠다. 강사의 자녀이기에 더 신경 쓸 것이라는 오해를 받을까 봐 의도적으로 배제를 하기도 했었다.

어린 딸아이는 어미의 부끄러움을 더 집었다.

“엄마는 언니 오빠들은 다 칭찬해 주면서 나랑 오빠는 왜 안 해줘?”

나는 내 아이에게 칭찬에 인색한 엄마였다.

두 아이들이 칭찬을 기다릴 떄 지친 목소리로 내 뱉듯이 “잘했다”고 했다.

그러니 강의실과 집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엄마에게 딸아이가 화낼 만도 했다.

칭찬에 인색한 엄마는 무섭기까지 했으니 엄마 옆에 쉽게 오지 못했을 것이다.

지적장애인 아들이 초등학교 때 심한 왕따를 당하고 올 때마다 아들의 편을 들어주기는커녕 호되게 혼을 냈었다. 왜 말을 못하냐고, 왜 못 때리냐고, 너두 때리라고 손에 베개를 쥐어주고 같이 때리기를 했지만 “때리면 친구들이 아파요”라며 맞고만 있는 범준이였다.

“친구들? 친구라면 왕따를 시키면 안되는 거잖아 그런 그 아이들은 친구가 아니야”라며 더 다그쳤었다.

둘째아이가 중학이 되어 내게 세 번째 속상함을 토한적이 있었다.

그때는 큰아이가 장애등록을 하고 장애인 엄마의 삶을 시작한지 4년쯤 되었을 때다.

그동안 호되게 나무라기만 했던 어미였기에 장애판정 이후에는 아들의 한마디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하려고 강의는 물론 경영했던 학원도 모두 정리하고 온전히 범준의 첼로연주를 따라 다녀야만 해서 둘째 아이에게 신경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국제동아리장과 학생자치법정 활동이며 국내외 기부봉사를 스스로 하기에 대견하다고 생각 했었는데 “엄마는 오빠가 해 달라고 하면 다 해 줄꺼지?”라며 속상해 하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읽어야 했다. 아니 안아줘야 했다.

그런데 내가 한 말은 “네가 장애인이니? 3살 아이랑 중학생이랑 넘어졌어. 그럼 누굴 먼저 일으켜 줄래? 나도 힘들어”

“..........”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둘째아이가 준 쪽지 때문에 운전하다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울었던 날이 있었다. 그 날은 범준군의 연주가 오전, 오후, 저녁까지 3차례 있던 날이어서 새벽부터 준비를 해야만 했다.

각각 다른 지역이라 전날부터 긴장 했었다. 이동 시간을 체크 하고 무더운 한여름의 야외 공연에 악기상태를 시시때때 신경 써야 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딸에게 언성을 높여가며 화를 냈었다. 딸아이는 억울하다는 듯이 울면서 집을 나서는 내게 나중에 읽어 보라며 쪽지를 건넸다.

운전하면서 뒤에 앉은 범준에게 동생의 쪽지를 소리 내서 읽으라고 했다. 감사하다는 내용의 딸의 편지에 차를 세워야 했다.

그 날은 딸아이의 생일이었다.

한여름의 폭염에 소나기까지 내려 첼로가 비에 젖고 활이 망가졌음에도 야외 공연과 국제포럼 초청연주 그리고 장애인 행사 연주까지 모두 무사히 마쳤다. 다시 쪽지를 펼쳤다.

‘마음을 전하는 편지

당신이 내게 표현 해주는 수많은 사랑도...’

편지의 시작부터 눈물이 나왔다.

‘당신이 내 엄마여서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이른 새벽부터 범준군의 연주 준비로 정신 없었던 내게 생일이었던 딸아이가 준 쪽지. ⓒ김태영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장애인 엄마의 이름표를 달고 있을 때 위축되었고

비장애인 엄마의 이름표를 달고 있을 땐 웃고 있었다.

나는 내 아이에게는 인색한 엄마다.

칭찬보다는 남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강조하고 강요했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을 강직하거나 뛰어난 사람은 남의 공박을 받는다는 해석보다는 남들과 똑같지 않고 그들과 다른 생각을 하거나 다른 행동을 할 경우 구설수와 피해를 입을 것에 원천 차단하려고 내 자녀에게 모질게 했었다.

‘과연 누구를 위함이었을까?’라고 자문하니 나는 나쁜 엄마였다,

장애인 엄마로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비겁하지는 않았을까?

비장애인 엄마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방목이란 핑계로 방임한건 아닌지...

내가 그동안 만나왔던 장애인 부모들과 비장애인 부모들 중에는 그 이기심과 피해로 절대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닮고 싶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응원하는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늦은 성장을 하고 있다. 그러니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다.

오빠 범준이가 동생에게 장난을 친다.

그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는 딸이 일부러 삐진 척을 한다.

그러면 범준이가 다시 달래주기를 반복한다.

남매의 모습을 보며 기도를 한다.

장애인 오빠로 인해 고학년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왕따를 당해도 꿋꿋하게 성장해 준 딸이 장애인 오빠를 책임지기 위해 끝없이 양보하고 한없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기다린다. 곧 그런 사회가 되기를 두 손을 모은다.

‘엄마’

내게는 참 어려운 단어다.

어떤 환경에도 강해야 하는 것이 ‘엄마’란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도 했다.

피한다고, 회피 할수록 그동안 미안했던 것들이 더해져서 더 미안한.. 나는 엄마다.

조용한 엄마가 아닌 공감하는 수다쟁이 엄마가 되고,

강요하는 엄마가 아닌 칭찬하고 응원하는 엄마로

장애의 유무로 비교하지 않고, 배제하지 않고, 함께 마주보는 엄마.

‘장애인 엄마’, ‘비장애인 엄마’의 이름표에 따라 영향받지 않으며

두 아이의 엄마로 내 자녀를 당당하게 칭찬하고 응원하는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서로 위로하고 함께 걱정하며 같이 응원하기에 그 노력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노력하여 만드는 세상에

함께 행복하고 같이 기뻐하는 생명존중의 사회를 향하여 모두가 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개개인이 만들어가는 사회에 미래의 희망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첼로와 평화를 연주하는 미소천사 배범준의 母 김태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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