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는 모습 ⓒ unsplash

반짝이는 4년간의 대학생활. 배우고 싶은 것에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고 모든 열정을 퍼부었고, 놀고 싶으면 놀고 마음껏 여행도 다녔다. 부모님과 지냈던 그 전의 생활에 비하면, 대학생인 나는 진정 자유의 몸이었다. 그런 나에게도 4학년, 그러니까 취업의 때가 찾아왔다.

고백하건대, 당시 나는 내가 하고싶은 게 무엇인지 당췌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학교 상담센터에서 진로상담도 꾸준히 받고, 교수님들께도 진로에 대해 고민을 자주 털어놓았는데도 그랬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하면 ‘사서’가 되는 것이 아주 당연해 보이지만 나는 그 ‘사서’가 되기 싫었다. 아니 정확히는 ‘사서’는 괜찮지만 ‘사서’가 되기 위해 공무원 시험을 치는 것이 싫었다. 가만히 앉아서 시험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싫었고, 공무원이 되는 것도 싫었다. 공무원을 떠올리면 무척 답답하고 인생에 더 이상 발전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단 한 가지 소원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고향에 내려가지 않고 독립해서 사는 것이었다. 고향에 내려가면 왠지 낙향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고, 패배감에 휩싸일 것 같았다. 이를 위해서는 몇가지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첫째는 경제력이었다. 대학은 어쨌든 교육의 일환으로 부모님의 지원과 국가장학금과 학자금 대출 등을 이용해 다녔지만,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일을 해야 먹고 살텐데 취업이 당장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둘째는 내가 살 곳이 필요했다. 하지만 휠체어가 들어가는 집을 찾기는 하늘에 별 따기였다. 겨우 학교 주변에서 한 곳을 발견했지만 역시 많은 불편함이 뒤따랐다. 그래서 많은 고민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혹시 교내에서 일할 자리는 없는지, 혹시 대학원이라도 가면 어떨지, 여러가지 방법들을 열심히 고려해 보았다. 하지만 모든 진로가 다 막혔다. 그래서 학기가 끝나는 12월, 씁쓸한 마음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과 지내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컸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 취업을 하는데 나만 집에서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처음엔 공부라도 해보려고 인터넷 강의도 결제하고 논문도 읽으며 머리를 회전시키려 애썼지만 혼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람 만나는 일이 줄어들다 보니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친구들의 별 의미 없는 말에 혼자 상처를 받기도 하고, 괜히 부모님께 화를 내고 세상을 탓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고향에 있는 어느 기관에 취업하게 되었다. 완전히 만족스러운 조건은 아니었지만 집에 있느니 나가서 무엇이라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적은 월급이지만 저축하면 언젠가 요긴하게 쓰일 것 같기도 했고, 사회성도 회복되리라 기대했다.

그리하여 첫 직장에서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여느 직장인이 다 그러하듯 100% 만족스러운 회사는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많은 경험을 하며 회사생활을 배웠다. 그리고 부족한 점은 공부로 메꿨다. 직장에서 좀 더 일을 잘해보고픈 마음에 온라인 학점은행제로 사회복지사 2급도 취득했다. 내 인생에 가장 열심히 살았던 순간이었다.

어느 여름, 회사에서 휠체어를 타다 우연히 휠체어가 뒤집어져 골절상을 입었다. 강제로 산재 휴가를 갖게 되었고, 집에서 책을 읽거나 TV를 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몇개월을 쉬다 문득, 직장을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 도전하고 애쓰고 싶었다. 포기했던 것들이 머릿 속을 가득 메웠다. 대학을 다닐 때 멀리했던 전공에 대한 미련도 생겼다. 막상 다른 분야에서 일해보니 전공분야가 그리웠다. 그리고 좀 더 큰 도시를 꿈꿨던 열정 넘쳤던 나를 떠올랐다. 대도시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과 함께이고 싶었다.

항상 가졌던 ‘이 직장이라도 다니는 게 어디냐’는 감사함은 어쩌면 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저 안정적으로 부모님과 함께 안전하게 살아가는 이 생활에 만족하며, 내가 꾼 꿈들은 모조리 외면하고 살았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퇴사를 결심하고 계약이 끝나가는 시점에 찾아가 더 이상 계약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리고 불안하지만 산뜻한 마음으로 회사를 나섰다. 그리고 결심했다. 정말 좋은 곳을 찾고야 말겠다고.

퇴사 후, 실업급여를 받으며 여러 곳에 지원했다. 늘 내가 휠체어를 탄다는 사실을 회사에 고지하면 불합격 소식이 돌아오곤 했다. 상심이 컸다. 매일 울었고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래서 다시 뭐라도 해야겠단 생각에 대학원을 알아보던 차에 예전 직장 팀장님께서 서울시 공무원 경력채용 소식을 들려주셨다. 다행히도 필기시험이 없었고, 서류와 면접만으로 이루어지는 시험이었다. 마침 사서직이 있었고 서울이었다. 그토록 싫어했던 공무원이지만 독립생활과 서울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에 끌렸다. 그래서 되든 안되든 경험해보자는 마음으로 지원했는데 기적적으로 합격했다.

지금의 생활은 예전 대학생활에 비하면 훨씬 더 즐겁다. 독립은 정말 짜릿한 것이다.

먼저 경제적으로 80% 이상 독립했기 때문에 돈을 어떻게 쓸지를 스스로 경험해보며 배울 수 있었다. 서울에 온 첫해에는 저축 없이 모두 소비하며 살았다. 없는 살림살이를 마련하고 직장생활에 필요한 옷과 화장품을 구매하는데 썼다.

그러다 해가 지나며 차츰 저축도 하고 적금도 넣는다. 그렇게 돈이 모이면 무언가를 배우거나 즐길 거리에 투자한다. 내가 번 돈으로 스스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무척이나 인간답게 만들어주었다. 독립이 주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그리고 스스로 인간관계를 구축해가야 하는 점도 사회성 발달에 아주 큰 도움을 준다. 처음 서울에 올라왔을 땐 아는 사람이 룸메이트 외에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해를 거듭하며 여러 활동에 참여하다 보니 새로운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서울엔 나같이 독립해서 사는 청년들이 지방에 비해 훨씬 많다 보니, 이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가 존재한다. 때문에 어울리기가 더 좋은 것 같다. 서로 챙기고 의지하며 때로 가족처럼 지내니 서울살이가 결코 추운 것만은 아니구나 싶다.

연애하기에도 굉장히 좋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 연애가 너무 힘들다. 특히 장애인이면 힘들 확률이 더 높다. 장애인의 삶에 부모님의 영역이 너무나도 큰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어떤 데이트를 하는지, 심지어 어떤 스킨쉽을 하는지까지! 부모님은 온통 걱정 투성이다.

하지만 독립해서 살면 그 모든 것이 자유롭다. 어떤 연애가 건강하고 좋은 연애인지 스스로 깨닫고 배우게 된다. 부모님의 눈치를 보는 연애가 당사자들에게 정말로 괜찮다면 다행이지만, 은밀한 사랑을 속삭이는 순간에 간섭 받고픈 사람이 대체 어디 있을까.

이 외에도 여행을 하거나, 공부를 하거나 하는 모든 일상적인 면에서 독립은 이롭다. 외로울 것도 같고, 무서울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가족과 함께일 순 없지 않은가.

가능하면 조금씩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 혼자일 때를 대비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독립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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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혜 칼럼리스트
서울시립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아 월급의 대부분을 문화생활에 쏟고 있으며, 주말에 집에 있으면 몸이 쑤시는 몹쓸 병 때문에 어디론가 자꾸만 나들이를 떠나곤 한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칼럼 지면을 통해 여성, 청년, 장애인으로서 겪은 고유의 경험과 생각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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