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활한 우주를 홀로 바라보며 꿈꾸는 청년 ⓒ Unsplash

서울살이를 하다 고향에 가면 어른들께 항상 듣는 말이 있다.

“참 대단하다. 서울에서 그렇게 독립해서 사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처음엔 이런 말을 듣고 조금 불쾌했다. 왜 대단한 일이지? 내가 장애인이라서?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런 말을 할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장애인이라서가 아니라, 취업이 힘들어 청년이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더군다나 젊은 여성이 멀리 대도시에 나가 터전을 꾸리고 산다는 것도 사실 누가 봐도 썩 수월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이 약하고 걷지 못하니까 어디서든 다치기 쉬우니 그럴만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과의 동거보다 독립을 선택한 이유가 어디 대단한 데 있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내 성격 탓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간섭받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좋은 소리라도 세번 이상 반복되면 잔소리가 된다고 믿는다.

부모님의 말씀이 옳은 소리라는 건 알지만 나에겐 귀찮음이 된지 오래고, 머리가 크니 그걸 마냥 들으며 버틸 수 없었다. 가족과 같은 가까운 관계가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서로 지킬 건 지키고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와야만 했다.

고등학교 2학년, 학교에 다니기 싫어 집에서 한 달 동안 시위하다 드디어 자퇴를 감행했다. 당시 모의고사 점수 1점, 등수 1등에 엄청나게 예민한 교실 분위기 속에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친구들의 도움이 없이는 학교생활이 힘들었는데, 친구들이 예민하니 도움받기도 힘들었다.

모두 나를 대놓고 괴롭히진 않았지만 슬슬 피해다녀서 자존심이 상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교우관계의 파탄이 성적하락에도 큰 영향을 주어 그냥 다 그만두는 시점에 이른 것이었다. (친구들 도움 없이 학교생활이 불가능한 부분은 학생으로서 차별을 겪는 것이지만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다.)

학교를 그만두고 1년 반을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만 살았다. 겨우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교회가 유일한 외출이었다. 부모님은 안타까운 마음에 나를 안쓰럽다 못해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셨고, 나는 부모님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보는 것에 한번, 내가 그런 자식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임에 한번, 그리고 학교, 친구, 성적 모두를 잃은 것에 인생을 실패한 것 같아 또 한번 좌절했다.

부모님과의 심각한 트러블이 매일 반복되었다. 가족 모두가 서로 소리를 지르고 문을 잠그고 눈물을 흘리며 마음이 곪아갔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런다는 걸 알기에 마음이 더 쓰라렸다.

게다가 당시 집안에 힘든 일들이 거짓말 같이 겹쳤다. 부모님이 더이상 모든 것을 포기한 나에게 신경써주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성적은 무슨, 하루하루를 버텨가는 것이 숙제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그 아무것도 없었고, 오전 열한시에 일어나 새벽 다섯시까지 부모님 눈치에 공부하는 척하며 주구장창 게임만 했다.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였다. 무언가를 시작하고 도전할 에너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자퇴 다음 해에 고졸검정고시를 쳤다. 고1 때까지 나름 공부를 해왔던 터라 검정고시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수능은 어떡하지. 대학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발목을 잡았다. 자퇴 전 나름 상위권을 유지했던 나였는데, 자퇴 후엔 책을 하나도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가정학습도 받았지만 마음이 상한 상태에서 글자가 들어올리 없었다. 그땐 막막함 그 자체였다.

그런 상태에서 무작정 수능을 쳤다. 성적은? 최악이었다. 이 성적으로 대체 어디를 가지? 재수를 해야 하나? 이 상태로 1년을 더 보내는 건 정말 끔찍한데. 그렇다고 대학을 가자니 성적이 안되고, 정말 대책이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집 주변 국립대의 ‘사회복지학과’에 가길 원하셨다. 왜? 내가 몸이 불편하니 남을 도우는 일을 하면 좋을 것 같아서인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그게 죽도록 싫었다. 전처럼 아빠가 통학을 시켜주면 캠퍼스의 로망이란 하나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당시 나는 삐뚤어져서 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당장 힘들어 죽겠는데 누굴 도우라는 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장애학생이 많기로 이름난 두 사립대에 원서를 넣었다.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A대학은 수능 성적은 안보고 내신과 면접만 보고 학생을 뽑는다고 했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사회복지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하지만 집에서 3시간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면접일이 다가오는데, 면접을 보러갈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가고싶다고 혼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빠가 학교에 데려다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병원에 입원해있던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의논했더니, 너무 멀어서 보내는 게 내키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화가 났다. 그럼 대체 비싼 지원서는 뭐하러 넣었는지, 나는 평생 부모님이랑만 살아야 하는지를 호소했다. 엄마는 미안해하며, B대학에 합격하면 무조건 보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B대학의 합격 발표가 있는 날, 몹시 불안해하며 발표시간을 기다렸다. B대학은 ‘문헌정보학과’와 ‘경제학과’에 지원했다. ‘문헌정보학과’는 내가 지원한 모든 전공 중에 가장 가고 싶은 곳이었다. 장애학생 특별전형으로 지원했는데, 나 말고 한명의 경쟁자가 더 있는 듯했다. 그리고 ‘경제학과’는 나름 하향지원한다고 생각하고 넣었는데 후보 신세였다.

예정된 시간에 합격자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아 초조해하던 차에, 뒤늦게 결과가 떴다. 문헌정보학과 합격이었다. 오, 맙소사. 내가 가장 가고싶은 학과에 합격하다니. 하지만 그곳도 집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다. 부모님이 허락을 해주실지 불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더니 한번 시도해보자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대학 입학을 감행할 수 있었다. 그 학교는 다행히도 장애학생이 많아 기본적으로 자립생활이 가능한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처음으로 부모님으로부터 떨어져 사는 것, 고등학교 내내 공부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뼈가 약해 변형된 내 몸을 처음 보는 친구들에게 보이는 게 가장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뻔뻔하게, 당연히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용기를 냈다. 장애는 죄가 아니니까.

도움을 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했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것 같이 여겨져 때론 자존심이 상했고 그런 나 자신이 싫을 때도 있었다. 친구들과 오해가 생겨 이야기를 하다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걸 이겨내지 않으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걸. 돌아가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을텐데.

태어나서부터 22살이 될 때까지 부모님이 나의 손과 발이었는데, 이제는 떨어져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때때로 힘들었다. 이 사실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나 스스로의 생존 문제이기 때문에 심각한 것이 당연했고, 부모님은 부모의 입장에서 나를 타지에 멀리 보내놓고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냄으로써, 우리 가족 모두에게 ‘자유’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이 찾아왔다. 나는 부모님의 동의 없이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노래방에 가고 카페에서 수다를 떨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커다란 서점에 가서 책을 구경했다. 때로 여행을 하며 더 큰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부모님 또한 나의 빈자리를 자신들의 시간으로 채워갔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인간관계를 넓히고 주말에 나들이를 떠나셨다. 독립 전엔 꿈도 꾸지 못하는 일상이었는데 말이다.

나의 고등학교 자퇴 후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 받았던 우리 가족은, 일년에 며칠 만나지 못하지만, 사실 그래서 서로에게 더 애뜻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거리를 유지하며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린 그때를 돌이켜보며 줄곧 이야기하곤 한다. 그때 그렇게 결정해, 정말 다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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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혜 칼럼리스트
서울시립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다. 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아 월급의 대부분을 문화생활에 쏟고 있으며, 주말에 집에 있으면 몸이 쑤시는 몹쓸 병 때문에 어디론가 자꾸만 나들이를 떠나곤 한다.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칼럼 지면을 통해 여성, 청년, 장애인으로서 겪은 고유의 경험과 생각들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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