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희를 생각하며 길을 걷고 있는 희준 ⓒ최선영

눈앞이 흐릿해졌다. 희준의 눈에 고여있던 뜨거운 눈물은 눈치 없이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행히 준서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어쩌면 못 본 척해 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속 깊은 준서는 그런 친구다.

"올 거지?"

“아니.”

“오면 좋겠다.”

“......”

준서와 헤어진 희준은 밤이 깊어지는 것도 잊은 체 준희와 걷던 길을 걸었다. 희준의 걸음이 멈춘 곳은 준희가 좋아하던 카페였다.

“이곳 커피 맛은 뭔가 달라.”

“난 잘 모르겠는데.”

“아냐, 분명 달라. 네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처럼.”

“뭐야, 심쿵 했잖아. 하하.”

희준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준희는 이제 그의 곁에 없다.

희준에게 이별을 말하는 준희 ⓒ최선영

“기다릴게.”

“언제 돌아올지 몰라. 기다리지 마.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미안해하지 마. 기다리는 게 당연한 거잖아. 대체 왜 그래?”

“미안한데... 기다리지 마. 네가 기다린다고 생각하면 나 부담스럽고 가서도 집중 못 할 거야.”

“그 정도였어? 난 너에게 대체 뭐였던 거야? 그동안 말 한마디 없다가 갑자기... 됐어.”

화가 난 희준은 준희를 카페에 남겨두고 그렇게 나와버렸다. 미친 듯이 차를 내몰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갔을 때 그녀는 그곳에 없었다.

“화내서 미안해. 네 입장을 이해해보려고 하는데 이해가 안 돼. 제발 전화 좀 받아.”

준희를 만나기 위해 늦은 밤 그녀의 집 앞을 서성였다. 준서는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마음이 초조해서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준희의 마음을 돌려놓고 싶었고 기다려달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낯선 차에서 그녀가 내렸다.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에서 준희가 왜 그렇게 냉정하게 기다리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준희는 희준에게 이별을 던진 것이다.

“넌 알고 있었어?”

“뭘?”

“준희... 다른 사람 생긴 거.”

“다른 사람?”

“그래 다른 놈.”

“......”

준서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올 거지?"

“아니, 내가 왜?”

“그냥 와서 잘 다녀오라고 해줘.”

“내가 잘 다녀오라고 하지 않아도 잘 다녀오겠지. 나 같은 건 이제 잊어버렸을 텐데.”

“어휴... 너도 참.. 바보다.”

희준은 몰랐다 준서가 남긴 그 바보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만난 희준과 준서 ⓒ최선영

“오랜만이다.”

“그래 3년 만인가?”

“벌써 그렇게 되었네. 시간 참 빠르다.”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그동안 너무 한거 아냐?”

“너 보면 준희 생각날 것 같아서 연락 일부러 안 받았어.”

“......”

“준희는? 잘 지내? 아직 공부 중인가?”

“응...”

“그래 똑 부러지는 애니까 잘 하겠지.”

“저... 실은...”

“응?”

준서는 하려던 말을 도로 집어 넣고 말을 돌렸다.

“준희가 먼저 가 아니고 내가 먼저였잖아. 연락 좀 하고 살자.”

“그래. 그러자. 이제 나도 준희에 대한 마음도 어느 정도 정리됐고. 너랑은 보고 살아야지.”

희준은 준희에 대한 마음이 비워진 줄 알았다. 준서를 만나도 이제는 편안하게 준희와 상관없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직장이 가깝다는 이유로 그들은 예전처럼 자주 만났다. 그동안 서로가 없었던 세월의 공백을 채우기라도 하듯 매일 저녁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만 마셔라. 너답지 않게 오늘 왜 이래? 술도 못하는 녀석이 잔뜩 퍼붓고.”

“넌... 바보야. 준희는 더 바보고.”

“갑자기 준희 얘기는 왜.”

“그래, 둘 다 그러고 살아라. 준희도 너도.”

“많이 취했다. 그만 일어서...”

일어서자는 희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서는 탁자에 머리를 박고는 잠들어버렸다.

희준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준서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침대에 준서를 눕히고 시원한 얼음 물을 마시며 오르는 술기운을 가라앉혔다.

준서 폰이 울렸다. 준희였다.

“아직 그 번호를...”

어느 정도는 정리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다시 희준의 마음 한편에서 꿈틀거리며 살아나는 듯했다.

전화벨은 계속되고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전화도 없이 왜 안 들어와. 사람 걱정되게.”

“나 희준이야. 준서 술 먹고 지금 자고 있어.”

“......”

준희의 숨소리만 가늘게 들렸다.

“언제 들어온 거야? 왔다는 말 못 들었는데...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응... 오랜만이네.”

“너.. 떠나는 날, 준서가 오라고 했는데.. 못 갔어. 너 불편할까 봐. 잘 다녀오라는 인사 정도는 했어야 하는데. 너 보내고 내가 너무 옹졸한 놈 같아서 후회했어.”

“응.. 오빠 별일 없는 거 알았으니까... 끊을게. 잘 지내.”

준희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가 불편한가 보네... 나이가 드니 철도 들었나 보다. 쌍둥이는 오빠 아니라더니... 이제 오빠 소리도 하고.”

희준은 혼잣말을 하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음날 준서는 머리를 움켜쥐며 잠에서 일어났다.

“준희 언제 들어왔어?”

“아...”

“그게 무슨 비밀이라고.”

희준은 혼자 가겠다는 준서를 차에 태웠다.

“이사는 언제 한 거야?”

“그때, 준희 가고 바로 했어.”

“갈게.”

“여기까지 왔는데...”

“됐어. 그냥 갈게. 준희가 불편해할 거야.”

준서는 희준을 미안한 마음으로 보냈다.

준희를 보고 있는 희준 ⓒ최선영

길모퉁이를 돌던 희준은 안내견과 함께 걸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준희였다.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준희는 희준의 옆을 그대로 지나쳐갔다.

“왜 말 안 했어?”

다음날 준서를 만난 희준은 준서의 멱살을 잡았다.

“내가 준희라면 어떻게 할까... 많이 생각해봤어.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아.”

“말했어야지. 너라도 말해줬어야지.”

“준희 성격 알잖아.”

“그때 미국 갔던 거는?”

“유학이 아니라 수술받으러 갔었어. 수술 잘 되면 그때 말하려고 했었는데... 수술 못 받았어. 그곳에서도 안된다고 해서.”

“젊은 나이에 실명이라니...”

“생각지도 못했지 우리도. 준희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전혀 못 보는 거지?”

“전맹이 된 건 1년 정도 됐어. 지금 겨우 안정을 찾았어. 그러니까..”

“그때 내가 집 앞에서 본 그 남자는 뭐야?”

“너 포기하게 하려고.”

“알았어. 일단 알았어.”

희준은 혼란스러웠다. 준희가 이별을 던진 이유가 그런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일주일이 지나고 희준은 준희를 찾아갔다.

이야기를 나누는 준희와 희준 ⓒ최선영

“네가 날 떠난 이유가 고작 이런 거였어? 다시 시작하자.”

“다시? 뭘?”

“말을 했어야지. 그게 이별의 이유가 돼?”

“응. 충분히 돼. 준서 오빠 데려다주던 날, 나 봤었잖아. 내가 지나가는 거.

난 너 봤어. 아니 느꼈다고 해야 하나? 숨소리, 냄새... 여전히 느껴지더라. 내 감정이 지난 3년 동안 정리된 덕분에 날 보고도 내 앞에 나서지 않는 너를 이해할 수 있었고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어. 만약 3년 전에 내가 말했으면 넌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아마 많이 힘들어했을 거야. 못 본체도 못하고 아주 많이 괴로워하고. 그런 널 보면서 나는 어땠을 것 같아? 그런 너를 보는 걸 감당 못했을 거야.“

“그래, 사실 갑자기 네가 장애인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나서 놀랐어. 일주일 동안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네가 장애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너를 잊기 위해 발버둥 쳤던 지난 3년... 그 3년이 내 감정을 무디게 만든 탓도 있어. 지금도 내가 널 그때만큼 좋아하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거야.”

“네 마음을 들여다봐.”

“응 충분히 들여다봤어. 3년 전에 내가 알았다면 미국에 함께 갔을 거고 수술 못 받는다 해도 절대 흔들리거나 네 곁을 떠나는 일도 없었을 거야. 네가 볼 수 있을 때 많은 것을 함께 보고 나누었을 거야. 넌 그 시간을 날려버린 거야. 우리의 소중한 시간을... 난 그게 지금 화가 나고 속상해.”

“......”

“이 바보야.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였어?”

“난 무서웠어. 우리 엄마가 사고로 다리를 다치고 한쪽 다리를 잃었을 때 우리 아빠가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봤어. 처음에는 가슴 아파하고 속상해했어. 하지만 아빠는 예전처럼 엄마를 사랑하지 않았어. 똑같은 삶이었지만 마음이 변해가는 게 보였어. 내가 알 정도인데 엄마는 얼마나 더 느꼈을지..."

“사람은 다 달라. 아버님이 변한 게 아니라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버님이 더 속상하고 힘드셨던 건 아닐까? 네가 보는 두 분 모습과 준서가 보는 것은 달랐어. 어머님 스스로 아버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밀어내셨다고는 생각 안 해? 준희야. 어쩌면 내가 나중에 변할 수도 있겠지. 3년 동안 나 다른 여자도 만나봤어. 너를 잊으려고. 그 누구도 네 자리를 채울 수는 없었어. 너에 대한 감정이 무뎌졌다고 생각했어. 나도 살아야 했으니까. 잊으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아니란 걸 알았어. 네 전화번호만 봐도 울컥거리는 나를 보면서.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 커피 맛은 다르다고 했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른 것처럼. 나도 그랬어. 우리 고등학교 때부터 봐왔잖아. 날 모르겠어? 넌 내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야.”

사랑하기 때문에 아니 그 사랑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준희는 희준의 곁을 떠났다. 아버지가 변한 것처럼 희준도 변할까 봐.

“아빠... 엄마를 사랑하셨어요?”

“갑자기 그런 건 왜?”

“희준이 만났어요.”

“엄마랑 나는 둘 다 첫사랑이었어. 너와 희준이처럼. 준희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네 엄마 사고 나고 우린 많이 두려웠던 것 같다...”

아빠는 준희에게 말을 하다 말고 엄마 사진을 보았다. 그리고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준희와 희준 ⓒ최선영

준희는 희준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희준을 통해 세상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준희는 희준과 더 깊은 사랑을 나누며 알게 되었다. 엄마에 대한 아빠의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는 것을.

장애인이 되면 다르게 볼 것 같았고 사랑도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은 준희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었다. 엄마도 준희처럼 그런 편견을 안고 살았다. 끝내 그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만든 외로움에 갇혀 살았다. 그리고 엄마는 아빠 곁을 떠났다.

“준희야,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장애인 스스로가 던져버릴 때 세상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알아, 안다고. 나 이제 편견 없거든.”

“하하. 그래. 장애인에 대해 사람들 모두가 편견이 있을 거라는 비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버려야 해.”

“알아, 그것도.”

희준은 안다. 준희도 충분히 느끼고 있다. 세상이 준희를 향하는 편견의 벽이 높다는 것을. 하지만 그 벽을 넘기 위해 준희 안에 있던 또 다른 편견을 먼저 버리라고 희준은 말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도 서로가 편견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며 준희는 품 안에 넣고 있던 편견을 버리고 이제 희준과 함께 또 다른 빛을 향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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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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