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존재를 상상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필자는 전동휠체어를 이용하여 생활하고 있다. 가고 싶은 곳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나는, 새로운 곳을 갈 때면 ‘생각지도 못한 존재의 출현’으로 여겨질 때가 있다.

식당에서 접근성에 대해 물을 때면 “여기 휠체어 탄 사람은 안와요”, 어떤 강좌를 수강할 때면 “접근성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게 된다.

어떤 콘서트 예매 때는 공연장에 휠체어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휠체어석 예매 자체가 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장애인 손님이/수강생이/관객이 올 거라는 준비나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그럼 정말이지 장애인의 인구수가 거의 없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대한민국의 장애인 비율은 전체 인구의 5%, 정확히 254만명(보건복지부 장애인 현황, 2017년)이다. 이는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1~2명 이상의 장애인을 볼 수 있어야 맞는 말이다.

실제 장애인 단체가 주최하는 집회를 가보면 이렇게나 많고 다양한 장애인들이 어디에 있었을까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 똑같이 삶을 영위하는 존재지만 이들이 어느 곳에나 존재할거라 쉽게 생각하지는 못한다. 그럼 왜 우리 사회는 장애인이 어디서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첫째, 우리 사회는 분리된 삶에 익숙해진 것.

우리는 분리된 삶에 무뎌지고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작게는 일반석/노약자석, 대중교통/장애인 콜택시, 크게는 일반학교/특수학교, 일반 회사/장애인 자회사, 지역사회/장애인 시설 등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배려, 편리, 효율의 목적이라 하더라도 분리된 삶은 쉽게 고립될 수 있고, 사회통합이 어렵기 때문에 몸소 부딪히며 살 기회를 빼앗아 버린다. 그렇기에 장애인을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없는 환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째, 장애인은 여기 안 오는 게 아니라, 올 수 없는 환경이여서다.

휠체어 이용자라면 건물에 턱이나 계단이 없는 출입구, 엘레베이터가 있어야 그곳에 갈 수 있는 환경이 된다. 그럼 접근성이 보장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장애인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빈도가 높아질수록, 다양한 곳에서 많이 볼 수 있고, 비로소 많은 이들이 어디서나 존재하는 장애인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장애인은 오지 않는다”가 아니라 ‘장애인이 갈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 정말 볼 수 없는 존재로 착각하게 된다. 당신이 있는 곳에서 장애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면, 실제 올 수 있는 환경인지 한 번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문화향유나 자아실현의 활동에는 더욱 장애인의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공공시설에는 어느 정도 접근성이 보장되는 경우가 있지만, 다수의 민간 학원, 여행지, 공연장, 미용실, 예식장, 취미 활동 등에는 더욱이 장애인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거나,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먹고 사는데 막대한 문제를 끼치진 않지만 그곳에 가고 싶어서, 혹은 놀고 싶어서, 결혼을 하려고, 내 모습을 가꾸기 위해서와 같이 생존권을 넘어 문화 향유나 자아실현을 목적으로 한 활동일 때 장애인의 존재를 더욱 생소하게 생각한다.

그것이 공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민간의 영역일 때, 먹고 사는 일보다 상위 단계로 올라 갈수록, 흔히 말하는 중상위계층들이 항유할 만한 문화일 때 그곳에 장애인이 있을 거라 흔히 상상하지 않는다.

셋째, 미디어에서 비춰진 장애인의 모습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지 않았다.

미디어에 비춰진 장애인들은 주로 어디에서 나타날까? 이들은 집안이나 병원, 복지관 같은 ‘장애인들이 많이 있을 법한 곳’에서 제한된 일상을 주로 보여준다.

‘정치를 하는 장애인’이나 ‘요리를 하는 장애인’은 별로 본적이 없고, 하물며 ‘길을 건너는 장애인’, ‘여행지에 있는 장애인’, ‘직장 동료인 장애인’ 같이 어느 곳에나 다양하고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닌 ‘비련의 주인공’이나 ‘장애극복’의 모습만 자주 봐왔기 때문이다.

한정된 곳에서만 장애인의 모습을 그려줌으로써 어느 곳에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차단하게 된다. 그렇기에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어울려 사는 모습을 학습한 적이 별로 없는 것이다.

좋은 의도, 나쁜 의도를 떠나서 장애인은 여기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는 좋지 않다. 어디서나 존재한다고 상상하지 못하므로, 어디서나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구조니 말이다.

장애인은 어디에서나 존재하며,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어야 한다. 장애인은 나와 다른 세계 사람이 아니며 미디어에서나 본, 여기에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럼으로 어디서나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존재로서 상상되길 바란다.

앞으로 분리된 삶에서 통합된 삶으로 나아갈 때, 미디어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장애인의 모습을 그릴 때, ‘우리 식당에는 안오겠지’가 아니라 ‘누구나 올 수 있게 준비할 때’ 장애인은 어디에나 있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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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정 칼럼리스트
전 장애인권운동 활동가이며, 지금은 장애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장애인의 매력적인 삶을 위해 기존에 틀에 물음표를 던지고 새로운 것들에 시도하려고 한다. 장애인이자 청년이자 여성으로서 경험하는 여행, 미디어, 일상을 나눌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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