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어하는 수미에게 말을 건네는 혜성 ⓒ최선영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대학에서 열리는 음악 콩쿨이 있던 날입니다. 장염으로 새벽까지 고생을 하다 참가 한 수미는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벽에 몸을 기댄 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걸음이 있었습니다.

“물 좀 마실래?”

혜성의 작은 친절에 살며시 실눈을 뜨던 수미는 혜성과 한 몸이 되어 있는 클러치를 보고 몸을 바로 세웁니다.

“괜찮아. 고마워.”

“응...”

혜성은 수미가 괜찮다고 하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습니다.

그러다 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수미는 얼른 몸을 일으켜 물통을 주워 혜성에게 건넸습니다.

“아... 고마워.”

“고맙긴, 나 물 주려다 그런 건데.”

“응...”

“넌 학교 어디야?”

수미가 혜성의 걸음을 잡았습니다

“난 00고야. 넌?”

“난 00예고.”

“그럼 엄청 잘 하겠네.”

“잘 하는 건 아니고..."

수미와 혜성은 어느새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몇 번이야?”

“8. 넌?”

“46”

“좋겠다. 난 배도 아프고 힘든데 번호까지... 아.. 힘들다.”

“바꿔줄 수도 없고... 어떡하냐..”

“인생이 그렇지 뭐. 쉬운 게 없지.”

“인생이 쉬우면 재미없지...”

“꼭 어른같이 말한다.”

“이제 곧 어른이잖아. 대회 끝나고 원서 쓰고 실기 보고 그리고 졸업하면 어른이지.”

“어른은 나이로 되는 게 아니잖아.”

“네가 더 어른 같다.”

“그런가? 호호.”

피아노를 치는 혜성 ⓒ최선영

이야기를 하다 보니 혜성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혜성의 희고 가느다란 손끝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는 앞 번호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색다른 깊이와 매력이 느껴졌습니다.

입시와 콩쿨을 준비하는 일반적인 학생에서 나오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재잘거리던 다른 아이들도 숨소리를 죽이며 흘러나오는 혜성의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보통 심사는 곡 전체를 듣지 않습니다. 시간 관계상 점수를 채점하는 구간들이 지나면 ‘땡’ 하며 종소리를 울려 심사가 끝났음을 알려주는데 혜성은 마침을 알리는 ‘땡’ 소리가 들리지 않아 연주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곡이 다 끝나 갈 무렵에야 ‘땡’소리가 들렸고 쇼팽에 이어 베토벤도 그렇게 끝을 내고 나왔습니다. 시험장을 나오는 혜성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너 피아노 어디서 배워?”

“정말 잘 친다.”

아이들의 쏟아지는 질문을 뒤로하고 혜성은 수미에게 옵니다.

“정말 대박!”

“고마워.”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수미의 배는 점점 더 아팠고 결국 겨우 치는 흉내만 내고 내려와야 했습니다. 혜성은 본선에 진출해서 남아야 했고 수미는 예선에서 탈락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본선 나가는 것보다 빨리 집에 오고 싶다는 생각뿐이던 수미는 제 실력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수미가 배를 움켜쥐며 가는 뒷모습을 보며 혜성은 전화번호도 묻지 않은 것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만났습니다. 대학 수시 실기가 있는 학교마다 경쟁자로 마주하며 서로를 응원해주었습니다.

같은 학교를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나란히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고 혜성의 친구 동관과 수미의 친구 연재와 함께 꿀맛 같은 휴식의 시간을 보냅니다. 절대 우정 변치 말자며 새끼손가락도 걸며 그동안 힘들었던 시간들을 털어냅니다.

“야 우리끼리는 서로 좋아하고 그런 거 절대 하지 말자.”

“걱정 마라. 그럴 일 없을 테니.”

“그래, 남자로 보여야 좋아도 하지.”

“너네는 뭐 여자로 보이는 줄 아냐. 그냥 사람이다 사람.”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며 잠깐이지만 여유로운 시간을 함께 했던 그들은 입학 후에는 각자의 바쁜 일상에 내몰려 자주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날짜를 정해놓고 만나지 않으면 서로에게 너무 소홀해질 것 같다는 혜성의 제안에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은 꼭 함께 합니다.

“얘들아 나 고백할 거 있어.”

수미의 말에 혜성은 불안한 눈빛을 보냅니다.

“혹시? 너...”

“맞아. 나 남자친구 생겼어.”

동관의 말에 수미는 웃으며 대답합니다.

“어떤 애야?”

“애 아니고 오빠야.”

쓸쓸한 표정을 짓는 혜성 ⓒ최선영

수미를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혜성은 수미가 만나는 사람이 수미보다 4살이나 많은 수미 학교 선배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냥 스치는 인연일 거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혜성은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수미를 보며 마음 저 깊은 곳이 아프고 쓸쓸했습니다.

동관과 연재는 규칙을 깨고 연인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그들의 모임은 자연스럽게 드문드문 해졌습니다. 바쁜 시간을 서로 맞추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그들에게서 멀어진 수미의 빈자리가 컸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혜성은 준비했던 유학을 떠나려고 합니다. 동관과 연재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생각입니다. 혜성을 보내는 날 함께 모이기로 했지만 수미는 끝내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동관과 연재도 수미의 소식을 알지 못해 답답해했습니다.

체한 것처럼 답답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혜성은 수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혜성아.”

집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는 혜성을 향해 수미가 다가옵니다.

“수미야... 애들이랑 너 많이 기다렸어.”

“미안... 내가 너무 바빠서... 그래도 널 그냥 보내는 건 아니다 싶어서 인사라도 하려고 왔어.

잘 다녀와. 열심히 하고.“

“으... 응.. 고마워.”

“그럼...”

“수미야...”

수미는 혜성이 불렀지만 빠른 걸음으로 혜성에게서 멀어졌습니다.

다음 날, 공항에 배웅 나 온 동관과 연재는 수미의 소식을 전합니다.

“수미... 너무 안됐어.”

“수미가 왜?”

“아버지 사업이 잘 안돼서 학교도 3학년 때 휴학하고 그 오빠와도 헤어졌대”

“누가 그래?”

“어제 예고 동창이랑 통화하다가 알았어. 걔네 부모님이랑 수미 부모님이랑 많이 친하시거든.”

혜성은 연재의 말을 듣고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생각에 잠깁니다. 그리고 수미가 아르바이트한다는 곳으로 향합니다. 동관과 연재는 혜성을 말렸지만 혜성은 비행기를 타는 대신 수미를 향해 달려갑니다.

“수미야.”

“어... 너 지금 비행기 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같이 가자.”

“......”

“나 너 처음 봤을 때부터 친구 하기 싫었어. 너 좋아했어. 이게 널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알 수 없는 내 마음이었어.”

“혜성아-”

“알아. 나... 장애인이어서...”

“그게 아니야. 난 너 한 번도 장애인이라고 다르게 생각해본 적 없어. 다만 지금 내 형편이 힘들어. 누구를 다시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도...”

“네가 오빠를 사귄다고 했을 때...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아프고 힘들었어.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을 그때 알았어. 내가 장애인만 아니었어도 난 그때 널 잡았을 거야. 네가 그 오빠 곁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고백한 번 못해보고 그냥 포기해버렸어.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 장애인이라도 상관없다면 나를 좀 봐줘. 시간이 걸려도 괜찮아. 기다릴게.”

“대학 휴학에 가난해진 내가 괜찮다면 조금만 기다려 줘. 생각할 시간... 나... 늘 네가 멋있었어. 나보다 피아노를 더 잘 치는 게 질투가 났지만 멋있었어. 너 유학 다녀와. 그때도 네 마음이 지금과 같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절대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절대로. 그냥 멋있는 친구 말고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싶어. 그때는...”

혜성은 다시 공항으로 갑니다. 톡으로 메일로 그들은 만나지 못하는 시간의 공백을 채웠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모여 단단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4년 후

다시 만난 수미와 혜성의 다정한 모습 ⓒ최선영

혜성과 수미는 다시 만났습니다. 그동안 수미는 복학을 해서 졸업을 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하루하루였지만 혜성의 위로와 응원으로 수미는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 차가운 겨울이 시작되었지만 그들의 따뜻한 사랑이 있어 그 어떤 계절보다 더 포근하고 아름다운 겨울입니다. 이 계절에 그들은 이제 하나가 됩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물을 건네는 혜성의 손이 좋았던 수미는 이제 그 첫 만남의 두근거림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고백합니다.

“사실은 나도 그때 엄청 설레었어. 잘생겨서 그랬고 피아노를 너무 잘 쳐서 또 그랬고. 무엇보다 따뜻한 네 마음이 보여서 좋았어.”

혜성은 수미를 말없이 꼬~옥 안아줍니다.

시작된 겨울의 추운 바람도 그들의 따뜻한 사랑 앞에 살며시 녹아내리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시작한 그들은 오늘도 함께 피아노 앞에서 아름다운 연주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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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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