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평소 심봉사임당에서 친하게 지내는 두 팀의 가족들과 우리 집 근처 키즈카페에 가게 되었다.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한 번은 올해 활동에 대한 평가 및 정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첫째 아이들이 모두 학령기에 접어들었기에, 몸놀이를 액티브하게 할 수 있는 키즈카페에 아이들만 들여 보내 놓고, 다섯 명의 엄마 아빠들은 바로 옆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호사가, 마침내, 기어코, 드디어, 우리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아!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더없이 재미있고 신나게 놀았다.

엄마 아빠들은, 액티브한 말썽꾸러기 아들들을 키우면서 헐크맘과 몬스터데디가 된 사연을 무슨 고해성사 하듯이 고백하기도 하였고, 같은 또래 아이를 키우는 장애부모로서의 애환 등을 블랙코미디급 유머로 승화시켜 공유하기도 하면서, 우리들만이 공감하며 서로 위안이 될 수 있는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나니, 아이들이 나왔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자리를 정리했다. 마침, 저녁시간이 되었기에, 우리는 바로 옆 맛있는 중국음식 전문점에서 함께 밥을 먹기로 하였다. 그런데, 식사 전 들렀던 여자화장실에서 뜻 밖에, 우리의 즐거운 시간을 망치는, 매우 불유쾌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와 전맹엄마, 그리고, 그 아이의 초등학교 4학년 딸이 함께 여자화장실에서 화장실을 이용한 후, 손을 씻고 있었다. 당연히, 아이는 자신의 엄마에게 늘 하듯이 자연스럽게 세면대와 비누의 위치 등을 알려 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착해라!’

사실, 나는 이미 내 할 일을 다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고 뒤 돌아서던 참이라, 그 분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40대 중반 정도나 되었을까, 많아야 50세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분의, 뭐랄까, 아이에 대한 동정과 연민의 감정이 철철 넘쳐 흐르는, 자신의 감정에 압도된 듯한 질척한 말투…

그것은 똑똑히 내 귀에 꽂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머리카락을 포함한 온 몸의 신경세포들이 비분강개하며 일어서는 듯한 감정을 느끼며 자동 멈춤으로 몸이 딱 굳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버젓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내 아이에게 저런 눈길이나 표정만 보낸다 해도 마음이 불편할텐데, 저렇게 대놓고 자기의 감정을 여과없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아이에게 배설(?)하다니…

어쩌면, 배설이란 말이 너무 과하게 들리는 독자들도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사회적인 맥락에서의 ‘말’, 그것도, 서로 일면식도 없으며, 필수적인 소통이 일어날 까닭도 없는 사람 사이에서의 ‘말’로, 이 여자분의 발언은, 너무나도 적절치 못하며, 예의에도 어긋난다.

더욱이, 이 말의 기능과 목적은 무엇인가?

누구를 이롭게 하지도, 유쾌하게 하지도 않았으며, 무언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긴요한 것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그녀의 말은 전혀 불필요한 말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녀의 감정표현으로 그 누군가의 마음이 위로 받거나 따뜻해지지도 않았다.

과연, 아이에게 그녀의 말이 위안이나 칭찬 비슷한 그 무언가라도 되었을까? 물론,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아이에게는 듣고 싶지 않은 불유쾌하고 거북한 말이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그저, 그녀는, 장애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적 감정에 압도되었으며, 그토록 불쌍한 장애인을 엄마로 둔 한 아이에 대한 자신의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안쓰럽고 불편한 감정을 주책없고 예의 없이 질질 흘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 나라의 장애인식 수준에서, 그런 생각을 갖는 것 자체를 탓할 수도, 나무랄 수도 없다. 또한, 한 개인이, 장애인에 대해 어떤 생각, 어떤 감정을 가지든 간에,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의 머리와 마음으로 생각만 하는 것과, 장애를 가진 사람과 그의 아이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 놓는 것은 엄연히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무신경하게 전혀 모르는 한 아이와 어른에게 입 밖으로 꺼내 놓은 순간, 그녀는 아이 앞에서 한 엄마의 존엄을 훼손했으며, 한 아이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만 했다.

우리 중 그 어떤 사람도, 그저, 길 가다가 마주친 엄마가 조금 초라해 보인다고 해서, 아이에게 무서운 표정으로 마구 화를 내고 있다고 해서, 일면식도 없는 아이에게 ‘아이구! 불쌍해라.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니?’라거나, ‘엄마 성질이 그 모양이라, 니가 고생이 많구나!’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대체 왜?

장애부모와 그 자녀들에게는, 왜 이렇게 쉽게 함부로 개인의 존엄과 자존을 침범하는 것인가?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정중히, 그리고,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우리들 앞에서, 소중한 우리 아이들에게 함부로 우리들에 대한 당신의 차별적이며 편견어린 감정의 배설은 자재해 주기를… 그런 무례한 감정 배설은, 집에서 혼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하시기를…

물론, 그토록 무례한 말을 들은 전맹 엄마와 아이는, 뭐, 이런 말은 늘 듣고 있다는 듯, 무심한 태도로 화장실을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 역시 나만큼, 아니 당사자 입장에서, 나보다 더 불쾌하고 속상했을 거라는 사실을…

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사실,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물어봐 주며 알아주고 싶었다. 엄마와 함께 다니면서 이런 시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네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는지, 이모는 그런 마음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속상하고 힘들면 언제든 이모한테 이야기 해도 된다고, 나 답지 않은 오지랖을 떨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만 굴뚝 같았을 뿐, 장소와 상황상, 마음과는 달리, 당장 그래줄 수는 없었다.)

아마도, 내 아이 역시 언제고 겪을 수 있는 일이기에, 이응이 얼굴이 그 아이의 얼굴에 오버랩 되어 떠올라서 더욱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모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 아이들은 부모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편견과 차별적 시선과 행동 등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남들과 조금 다른 부모의 모습을 편견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함께 받아내야 하며, 부모가 장애로 인해 차별적 처우를 겪는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되기도 한다. 성장과정에서 이런 상황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는 힘든 부분이 많을텐데, 때로는, 아이 자신이 부모의 장애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직접적 대상이 되기까지도 한다.

‘너희들도 많이 아프지? 엄마 아빠가 아플까봐 말하지 못한 아픔들이 너희 안에도 참 많을텐데… 우리들이 너희들의 그 마음을 어떻게 보듬어 주어야 할까?’

요즘, 나는, 심봉사임당 모임에서 즐겁게 노는 우리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문득 문득 이런 생각을 떠올리곤 한다. 이런 우리 아이들에게도 안전하게 자신들의 마음의 불편함을 이야기하고, 도움이 필요한 경우, 제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다양한 사회적, 심리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지만, 그 어떤 공적 주체도 아직은 우리 아이들을 제대로 돌아보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의 근본적인 원인은, 장애부모의 부모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남편과 내가 장애를 가진 부모들과 그 아이들이 함께 모이고, 다양한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도록, 이 모임에 공을 들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아이들이 그 누구에게도 이런 상황, 이런 마음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언젠가,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좀 더 자라서, 부모의 다름으로 혼란스럽고 화도 나고, 힘이 드는 그런 날이 온다면, 그 때, 아이들끼리 ‘아이, 짜증나! 우리 엄마는 왜 눈이 안 보여가지고 이렇게 나를 창피하게 만드냐?’라고 거침없이 말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공감을 주고 받기를 원해서였다.

아이가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이런 고민을 더 많이 해 오던 중에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생각이 더 많아진다. 이응이 또래보다 조금 더 큰 아이들을 키운 장애엄마들로부터, 아이들이 부모의 장애를 핸들링하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들어 왔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타인과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여학생들 중에는, 다른 아이들이 엄마가 안 보인다고 놀린다면서, 울면서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하고, 그보다 쉬크하고 덜 관계지향적인 어떤 아들은, 그냥 회피하거나 속을 드러내지 않는다고도 한다.

우리 아들은?

성장 과정에서 늘 뭐든지 남들보다 좀 더 빨리 해치우는 성향 탓일까? 아니면, 이미, 엄마 아빠의 장애에 대해 너무나도 쿨하고 자연스럽게, 어찌 보면, 우리끼리는 좀 Radical할 정도로 장애에 대한 담론을 거침없이 논했던 탓일까? 얼마 전,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는, 요즘은 친구들이 엄마 아빠가 눈이 나빠 보여서, 자꾸 쳐다보고 주목 받게 되고, 아이들이 나를 놀릴까봐 조금 걱정이 돼. … 엄마, 미안해.’라고… 그러면서도, 내 마음까지 신경 썼다.

뭐, 아무리 몇 년간 준비하며 예상해 왔던 말이지만, 나도 사람이니만큼, 마음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엄마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공들여 온 의도 그대로, 아이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줬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답해 주었다.

‘그래. 이응이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쉽지 않은 얘기인데도 이렇게 엄마한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도 그런 마음이 들면, 지금처럼 솔직하게 엄마한테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응이가 그런 시선 때문에 불편한 점에 대해, 엄마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줄래?’

우리 아이들, 주변에서 무신경하고 예의 없는 사람들의 감정배설과 오지랖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받아들이며 소화하고 견뎌내야 할 것들이 제법 많은 아이들이다. 그러니, 제발, 부모가 장애인이라서 불쌍하고 힘들 것이라는 당신의 섣부른 예단, 부모를 돌보느라 아이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케어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은, 곱게 접어 맘속에만 보관해 두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요즘 부쩍 날씨가 추워져서였을까? 아니면, 이런 생각들이 맘속을 가득 채워서였을까? 여러 가지로 울적했던 어느 날,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추어 오랜만에 달콤한 생크림초코칩머핀을 구웠다. 따뜻한 우유와 함께 먹으면 온갖 걱정과 우울감이 날아갈 것만 같은 부드럽고 촉촉하며 달콤한 머핀이다.

아이에게 갖 구은 머핀을 내어 주면서 생각해 보았다.

우리 아이들에게, 아늑하고 안전한 작은 공간에서 갖 구은 머핀과 따뜻한 우유를 내어 주며, 장애부모를 둔 우리 아이들의 말하기 어려운 고민들과 마음의 갈등, 불편한 감정들을 들어주며 알아주고 보듬고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실은, 이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난 상담이라면 벌써 뭔가 오글거리고, 나에게는 절대로 맞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건조하기 이를 데 없이 살아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엄마효과인걸까?

혹시, 일 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하여, 올 하반기 내내 나는 MBTI 성격유형 심리검사 자격 강의를 듣고 있는데, 이런 마음 때문에,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심리검사 자격 과정도 이수하였다. 아직은, 어떤 모습, 어떤 자격으로 내가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장애부모 당사자로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대안을 열심히 찾아보고자 한다. 이응이와 우리 아이들이 장애부모 자녀로서 세상의 편견과 차별적 태도에 움츠러들지 않고 좀 더 밝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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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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