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포스터 ⓒ극단「애인」제공

극단 ‘애인’이 이 가을 관객에게 보내는 푸른색 편지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을 지난 11월 10일부터 17일까지 일주일간 ‘이음센터’ 무대에 올렸다. 작가 김연수의 동명 단편소설을 극단 ‘애인’이 그들의 색깔과 언어로 바꾼 작품이다.

지난 5월 <한달이랑 방에서 나오기만 해> 공연 이후 전국 순회공연도 힘들었을 텐데 그새 또 새로운 작품을 올리는 극단 ‘애인’은 참 부지런하다.

그 부지런함 덕에 관객은 그들의 작품을 더 많이 접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다.

무대 위 배경 ⓒ차미경

무대 위엔 두 개의 시공간이 존재한다.

정대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김무건의 현재.

김무건이 항암치료를 위해 누워 있던 병원에서 과거에 소설가였다는 노인 정대원을 만나는데 그 만남으로부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정대원의 이야기와 김무건의 현재 이야기가 펼쳐진다.

작가이면서 상담가인 김무건은 혹독한 투병의 고통 때문인지 어떤 이유로 말을 잃었다. 스스로 선택한 침묵인지 투병 중 생긴 증상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침묵의 고통 속에서 그는 자기와는 또 다른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노인 정대원은 ‘24번 어금니로 남은 사랑’이란 소설로 남겨진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김무건에게 들려주며 실연의 아픔을 견디기 위해 생어금니를 뽑았던 젊은 날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생을 마감하며 김무건에게 보내는 그의 유고에서 결국 인간은 고통을 느낄 때에만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달은 순간의 이야기를 하는데 이쯤에서 관객은 어렴풋이 알게 된다. 연극이 말하는 ‘푸른색’의 의미를. 치열한 고통의 빛깔, 깊고 외로운 침묵의 빛깔...

언어 이외에 긴 침묵, 그리고 ‘글씨’가 이 연극이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주요 방식이다. 특히 ‘글씨’는 이 연극에서 매우 특별하고 중요한 방식으로 사용되는데 말을 잃어버린 김무건의 생각이 전달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정대원의 유고 내용도 무대 위에 글씨로 나타나면서 관객에게 마치 직접 원고를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대 벽에 쓰여지는 글씨의 색을 통해서도 관객은 ‘푸른색’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정대원의 원고에서 검은색은 아마 맨 처음 쓰인 문장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수정하는 색은 붉은색이고 그것을 또다시 수정하는 최후의 색이 푸른색일 것이다. 그래서 ‘푸른색 문장’은 처음 문장을 붉은색으로 수정한 후에도 표현할 수 없던, 미처 쓰지 못한 것들을 담아낸 문장이다. 작가가 끝내 말하고 싶었던 진심을 고통을 통해 완성한 최후의 문장이 담긴 색, 그것이 바로 ’푸른색‘의 의미일 것이다.

그 푸른색의 의미에 ’우리‘라는 의미를 더했다. 그래서 김무건을 찾아와 자신의 아픔을 꺼내 놓는 상담자들 중에는 너무 뒤늦은 자립을 안타까워하는 탈시설 장애인도 있고 타인의 시선에 상처받는 여성도 있으며 마지막 무대 뒤 영상엔 촛불시위, 세월호 참사, 미투 운동 등을 연상시키는 화면을 통해 ’우리‘로 확장되는 고통의 의미를 보여준다.

개인적인 아픔으로 끝나버리는 개별적인 고통이 아닌 사회적 아픔으로 확장하고 연대하여 푸른색의 문장을 낳는 과정으로서의 고통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되묻게 하는 장면들이었다.

공연 후 모습 ⓒ극단애인

극단 ’애인‘은 그동안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회가 이미 틀 박아 놓은 소위 ’정상적‘인 소통방식을 과감히 깨는 시도들을 해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침묵의 효용성이라든가 장애인 배우들의 느린 말투와 몸짓에 고의성을 가미하여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특별하면서도 당당한 그들의 방식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는 변주없는 그 고집스런 전달방식이 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때로는 행간이 주는 여백이 더 긴 울림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김무건의 침묵, 느린 손글씨의 재현, 극상 환자인 그들의 느린 몸짓... 이런 것들 외에도 마치 일부러 길게 떼어 놓은 행간처럼 길고 긴 침묵들은 너무 과잉한 여백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더구나 원작에 대한 선행 지식이 전혀 없는 관객에게는 배우들 간의 그 긴 침묵이 조금은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원작에서는 글로 다 설명되었을 다소 미묘하고 섬세한 부분들을 긴 침묵만으로 이해되길 강요하는 방식은 어쩌면 관객에게 조금은 불친절한 방식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나처럼 별로 스마트하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안단테, 모데라토, 포르테, 스타카토... 음악이 이런 다양한 연주방식을 통해 듣는 이를 집중시키듯이 극단 ’애인‘의 무대도 다양한 변주방식과 속도감으로 더 흥미롭고 재미있어지길 기대한다.

배우 어선미 ⓒ 극단애인

이번 연극에서 내게 가장 깊은 호기심을 남긴 사람은 바로 김무건의 어머니로 등장했던 배우 어선미다. 극단 ’애인‘이 올린 그녀의 모든 공연을 거의 지켜봤고 최근 정신장애인들과의 콜라보 공연이었던 <우리, 여기 있어요>에서 연극 속에 털어놓은 그녀의 고백도 내 안에 깊이 남아 있다.

김무건의 엄마로 아들을 걱정하는 그녀의 연기를 보며 문득,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무척 궁금해졌다. 그래서 연극이 끝나면 극단 관계자에게 그녀의 연락처라도 물어서 그녀에게 꼭 인터뷰 요청을 해야겠노라고 다짐하던 바였다.

그런데 귀가하는 지하철역에서 내 안의 그 다짐을 마치 누가 듣기라도 한 것처럼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무대에서와는 사뭇 다르게 수줍고 조용한 모습의 그녀에게 불쑥 인사를 했더니 자기를 어떻게 아냐며 무척 당황한 듯 물었다. 오래전부터 그녀의 공연을 지켜봤던 팬이었음을 말하며 무례하게도 대뜸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그녀는 나직이 다음에요~ 라고 답했다.

수줍으면서도 단호한 그 거절을 충분히 이해했고 진심으로 존중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왠지 더 궁금해졌지만 그냥 명함 한 장을 건네고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서 왔다.

장애인 연극이라는 아직 이 황무한 바닥에서 연극배우로서 긴 시간 동안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배우 어선미를 나는 오랜 팬으로서 존경한다.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의 그 열정과 끈기는 충분히 찬사받아 마땅한 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렇게 뿌리내리며 만든 그늘 덕분에 더 많은 후배 장애인 배우들이 연극에 지칠 때마다 좀 더 힘을 내고 용기를 낼 수 있는 건 아닐까.

앞으로 그녀가 영화나 드라마에도 ’신스틸러‘로 등장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 극단 ’애인‘의 새로운 공연들에서 그녀만의 다채로운 빛깔들이 멋지게 발휘되는 모습을 더 오래 지켜보고 싶다.

진심으로 나는 그녀가 언젠가 내 인터뷰 요청에 응하는 연락을 내게 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때 나는 그녀와 마주 앉아 어떤 이야기들을 나눌까...? 혼자 빙긋이 상상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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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경 칼럼리스트 ㅅ.ㅅ.ㄱ. 한 광고는 이것을 쓱~ 이라 읽었다. 재밌는 말이다. 소유욕과 구매욕의 강렬함이 이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읽힌다. 나는 내 ‘들여다보기’ 욕구를 담는데 이 단어를 활용하겠다. 고개를 쓰윽 내밀고 뭔가 호기심어리게 들여다보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동작, 쓱... TV, 영화, 연극, 책 등 다양한 매체가 나의 ‘쓱’ 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쭈욱 방송원고를 써오며 가져 왔던 그 호기심과 경험들을 가지고... (ㅅ.ㅅ.ㄱ. 낱말 퍼즐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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