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구글

세계적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은 패럴림픽이란 이름으로 1960년부터 지금까지 장애인들만의 경기로 따로 행해져 왔다. 아시안게임 역시 따로이긴 마찬가지.

그러나 장애와 비장애인의 통합을 이야기하는 요즘 시대에 장애인만 따로 하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이 분리와 배제를 조장하진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통합이 왜 스포츠에서만큼은 이루어지지 못하는가.

장애인 선수가 어떻게 비장애인 선수와 겨루겠어?... 물론 신체적 능력과 기능에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니 그렇게 되묻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남자 올림픽과 여자 올림픽이 따로 있지 않고 흑인 올림픽과 백인 올림픽이 따로 있지 않은데 장애인 올림픽과 비장애인 올림픽을 따로 하는 것은 왜 아직 당연한가.

남녀 종목과 신체조건 별 체급 등이 다양하게 나뉜 경기 종목들에 장애인 종목만 더해지면 될 일이다. 가령 휠체어 농구 같은 종목은 비장애인도 휠체어를 타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경기가 된다면 훨씬 재미있는 경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또 컬링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면 어떨까? 탁구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팀 복식으로 하면 어떨까?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하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할 수 있는 스포츠 종목이 훨씬 더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2018 인도네시아 장애인 아시안게임 개막식 장면. ⓒ네이버

이런 생각을 새삼 하게 된 이유는 지난 10월 6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막된 2018 장애인 아시안게임 때문이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직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큰 규모의 지진과 공교롭게도 개막일인 10월 6일에 우리나라에 이례적으로 착륙한 10월 태풍 콩레이 때문에 안 그래도 관심이 적었던 장애인 아시안게임이 더 더구나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그나마 태풍이 물러간 다음 날 KBS가 전날 개막식 중계를 재방송한 덕에 2018 장애인 아시안게임의 개막식을 볼 수 있었는데 우연히 쓱 보게 된 개막식을 지켜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개막식에서 가장 내 눈에 선명히 들어온 사람은... 축제의 주인공인 장애인 선수들이 아니라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이었다. 그는 지난 8월 18일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마치 액션 배우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화려하게 등장해 인상적인 오프닝이었다는 찬사를 받은 쇼맨쉽이 대단한 대통령이다.

또 겉으론 정겨운 동네 아저씨처럼 순박한 얼굴을 한 대통령이지만 성공적인 아시안게임 유치를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폭압도 불사한 잔혹한 대통령이기도 하다. 기사에 의하면 가벼운 경범죄만으로도 하루에 수십 명씩 경찰에 의한 사살이 자행됐다고 하니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대통령이 개회사에서 너무나 온화한 얼굴을 하고 ‘인권’을 이야기하는 모습이 왠지 생경하고 모순적이어서 피식 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개막식 공연 중 큰 배 위에서 커다란 깃발을 돛처럼 올리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 깃발을 펼치기 위해 높은 돛대 위를 애써 올라가는 사람은 한 인도네시아 선수였다. 그는 한쪽 다리에 의족을 착용하고 힘겹게 돛대 위를 기어올라 깃발을 펼쳐 들었는데 그 모습에서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 장면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의족을 한 아이스하키 한민수 선수가 성화점화를 위해 높고 가파른 빙벽을 위태롭게 올랐던 그 장면 말이다.

그때 신문들은 "로프를 의지한 채" 빙벽을 오르는 한민수 선수의 모습이 감동이었다고 일제히 입을 모은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러나 그때 나는 감동할 수 없었다. 감동은커녕 참담하기까지 했던 그런 장면이 이번 인도네시아 개막식에서도 여지없이 펼쳐졌다.

로프를 의지한 채, 휠체어에 의지한 채, 의족 하나에 의지한 채, 흰 지팡이에 의지한 채... 장애인은 로프를 ‘붙잡고’, 휠체어를 ‘타고’, 의족을 ‘딛고’, 지팡이를 ‘드는’... 그런 주체가 아니라 늘 무언가에 의지하고 기대는 의존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그런 존재가 무언가를 힘겹게 넘어서고 가까스로 해내는 모습이어야만 보는 비장애인들에게 그나마 감동이 된다. 장애인이 소위 ‘감동 포르노’의 대상으로 아직도 쉽게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린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대통령님 거기 계십니까?”...

한 양궁선수 소녀가 휠체어를 타고 등장해 인도네시아의 다양한 장애인들을 영상으로 소개하며 이렇게 대통령을 부르니 환호와 함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다시 등장한다.

소녀의 부름에 응답해 등장한 대통령은 곧 상의 양복을 벗더니 양궁을 들어 뒤에 놓인 ‘Disability’라는 글자에서 Dis자를 멋지게 쏘아 떨어뜨려 ‘ability’를 만들어 주었다. 소녀의 요구에 따라 ‘장애’를 ‘능력’ 혹은 ‘할 수 있음’으로 바꾸어 주는 사람이 다름 아닌 착한 대통령인 것이다.

좋은 기회 주셨다고 감사하는 것도 좋고 장애가 능력이 되는 것도 좋다. 어쨌든 감사는 좋은 거니까... 그런데 이 장면에서도 역시 장애인은 기회를 베풀어야 할 시혜적 존재이고, 즐겨야 할 스포츠마저 ‘우리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이고 증명해야 하는 장이 되고 있다.

그뿐인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소녀에 대해 ‘눈이 보이지 않아도 음악을 사랑하는...’이란 표현을 하는가 하면 장애인 비보잉 그룹의 비보잉 댄스 무대에서는 ‘얼마나 의지가 강한지 비장애인 못지 않다’ 는 아나운서의 해설이 듣는 내내 귀에 거슬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음악을 사랑할 수 없는가? 시력과 음악은 하등의 상관관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또한 아나운서의 말대로 비장애인들은 일반적으로 장애인보다 의지가 강한가? 그래서 그렇게 ‘비장애인 못지 않다’고 표현하는 건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 말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자격이나 능력이 따로 필요치 않다. 의지를 발휘하는 것 역시 따로 자격이나 능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아직 그렇게 수준 이하의 표현들이 당연한 듯 통용되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나는 Disability가 굳이 ability가 되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사회가 사회적 장애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개인에게 있어 장애가 반드시 어떤 능력이나 할 수 있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 무능력하면 가치 없는 존재인가? 나는 늘 그 부분에서 마음이 언짢아지는 것이다.

온 세계가 함께 하는 스포츠 축제에서 장애인이 따로 분리되지 않고 다 함께 즐거울 수 있는 통합의 스포츠가 되도록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고민할 때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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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경 칼럼리스트 ㅅ.ㅅ.ㄱ. 한 광고는 이것을 쓱~ 이라 읽었다. 재밌는 말이다. 소유욕과 구매욕의 강렬함이 이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읽힌다. 나는 내 ‘들여다보기’ 욕구를 담는데 이 단어를 활용하겠다. 고개를 쓰윽 내밀고 뭔가 호기심어리게 들여다보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동작, 쓱... TV, 영화, 연극, 책 등 다양한 매체가 나의 ‘쓱’ 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쭈욱 방송원고를 써오며 가져 왔던 그 호기심과 경험들을 가지고... (ㅅ.ㅅ.ㄱ. 낱말 퍼즐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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