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마주 서있는 그녀 ⓒ최선영

낯설지 않은 만남, 그녀는 여름의 끝자락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다른 사람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깊은 상처로 그녀를 아프게 합니다.

그 흔적을 덜어낼 수도, 다른 어떤 이를 더할 수도 없는 그녀의 마음은 울퉁불퉁입니다.

그런 그녀 앞에 그가 조심스레 다가옵니다.

거리를 좁히는 그의 걸음도, 지켜보는 그의 마음도 그녀는 몰랐습니다. 어느 날 문득 무심결에 돌아보고 그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촉촉하게 젖어있는 그의 눈을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책 주세요.”

“아, 네. 처음이신가요?

“네 이곳은.”

“네... 어디선가 뵌 듯해서...”

그가 책방을 나가고 한참을 멀뚱거리며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어디서 봤지? 분명 낯이 익은데......”

희미한 기억의 길을 더듬어봐도 그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일주일 후, 다시 그녀 앞에 서 있는 그를 그녀는 환한 미소로 반겨줍니다.

“또 오셨네요.”

“네. 지난번 보니까 차도 마시고 책도 읽을 수 있는 곳이라...”

“마음이 쉴만한 곳이 필요해서 저를 위해 만든 곳인데 다른 분들도 좋아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에요.”

“이제 6개월 째인데 이만하면 자리 잡은 거죠.”

“어떻게 아세요? 6개월 째인 거. 처음이시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오며 가며 봤어요. 오픈할 때부터.”

“그러셨군요.”

그는 책을 두 권 골라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습니다.

책을 보는 그의 뒷모습이 익숙한 느낌입니다. 그녀는 그를 본 것이 여기가 처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 다시 기억 여기저기를 오가며 그를 찾아봅니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 우산도 없이 흠뻑 젖은 체, 책방을 찾아온 그의 모습을 보고 그를 기억해냅니다.

비에 젖은 체 그녀 앞에 나타난 그 ⓒ최선영

“그날도 이런 모습이었지... 그날도.”

“이제야 기억해냈군요.”

5년 전, 학교에서 그들은 만났습니다.

과는 달랐지만 교양과목 수업을 함께 들었습니다.

그녀가 그의 눈에 들어왔고 그 첫눈에 그녀는 그의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습니다.

“저... 이 책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꼭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라......”

그녀가 들고 있던 책을 빌려달라는 그에게 그녀는 책을 건넵니다.

“저는 이 책 3번이나 읽었어요. 그냥 하세요. 책은 빌리고 빌려주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어요.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값을 지불하고 보세요. 책을 빌려줄 상황이면 그냥 선물하세요. 전 그렇게 하거든요.”

“저....... 그게..”

“그럼 이만.”

그녀는 그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버렸습니다.

“책은... 그냥... 핑계였는데......”

그는 그녀를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그녀 앞에 나설 용기를 내던 중에 그녀에게는 이미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2년을 그녀를 지켜보다 좋아한다는 고백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녀가 자주 가는 카페 앞에 서서 창 너머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그녀를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 서 있는 계절은 그의 마음처럼 슬픈 눈물을 보냅니다.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에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그녀 앞으로 갑니다.

자신의 존재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많이 좋아했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옵니다.

그는 휴학을 하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혼자 떠난 여행, 모든 길에 그녀가 있었고 가는 곳마다 그녀가 보였습니다. 여전히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안고 그는 입대를 했습니다.

입대 후 그녀가 혼자가 되었다는 말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많이 힘들어하는 그녀가 혹시라도 도망쳐버릴까 봐, 위로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까지도 내려놓았습니다. 그 상처가 아물면, 조금이라도 새살이 돋으면, 그때 그녀 앞에 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졸업을 했고 그는 제대를 하고 복학했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머무는 자리’라는 책방 주인이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던 그녀 다운 그녀만의 쉼터입니다.

멀리서 보고 또 보기를 여러 번, 그가 다시 그녀 앞에 섰을 때 역시나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에서 다시 그날처럼 비가 옵니다.

비에 젖은 그를 보고서야 그녀는 기억에서 그의 존재를 꺼내들었습니다. 조심스레 다가와 젖은 눈으로 바라보는 그와 마주합니다.

“긴 시간 기다리며 지켜봤어요. 내 마음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를 바라며.”

마주 앉은 그와 그녀 ⓒ최선영

젖은 몸을 닦으라며 마른 수건을 건네고 그와 마주 앉은 그녀는 아무 말없이 그를 뚫어져라 봅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이런 말 하면 많이 당황스럽고 그럴 거예요. 하지만, 난 많이 기다리고 많이 망설이고 그러다 이렇게...”

“알아요. 그 마음. 뭔지 알 것 같아요. 그 사람... 그 오빠에 대한 마음이 그랬거든요. 고1 때, 고3이던 그를 학원에서 만났고 혼자 좋아했고 그 오빠가 들어 간 대학을 가기 위해 죽을 만큼 공부했어요. 그리고 그의 옆자리에 앉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어요. 동생으로만 보던 오빠의 마음을 내게로 향하게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어요. 오빠 옆에 다른 사람도 있었고.”

시간이란 게 묘약 같다는 말을 하는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힘들게 했군요... 미안해요.”

“힘든 게 아니라 당황스러울 뿐이에요. 제가 뭐라고...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날 이후, 그녀의 마음에도 그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 말처럼 지난 상처와 흔적은, 시간이라는 묘약과 새로 싹트는 감정이 더해져 어쩌면 아프지 않게 아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예전의 흔적으로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이제 그를 봅니다.

여전히 서툴지만 따뜻한 시선으로 천천히 그녀의 걸음에 맞추어 걷는 그가 그녀는 고마웠습니다.

티 나지 않는 그의 사랑은 늘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안아주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말도 없이 연락을 끊었습니다.

전화를 하고 톡을 보내도 답이 없는 그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새우고 다음날은 화를 내다,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음은 걱정과 야속함과 온갖 상상으로 너덜너덜해졌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누나로부터 그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사고로 그의 눈이 실명 위기에 놓여있다는 말을 겨우 입 밖으로 내는 그의 누나와 함께 그녀는 많이 울었습니다.

그녀가 놀랄까 봐, 또 많이 힘들게 할까 봐, 그냥 사정이 생겼다고 기다리지 말고 잘 지내라고만 말해달라고 했는데 누나는 있는 그대로 그녀에게 그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많이 아프죠.”

붕대로 눈이 가려진 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그는 그녀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합니다.

붕대를 눈에 감고 있는 그를 보는 그녀 ⓒ최선영

"많이 아플 텐데......"

“진통제 맞아서 그냥 견딜만해요. 그냥... 돌아가요. 그게 절 편하게 해주는 거고, 덜 아프게 하는 겁니다.”

“나... 많이 좋아해요. 이런 일 있기 전에 이미 하고 있던 생각이고 품었던 마음이에요. 다시는 사랑 같은 거 못할 줄 알았는데... 나도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거... 알잖아요.”

“난... 난... 이제...”

“평생 낫지 않을 것처럼 아프고 그 상처 때문에 울퉁불퉁 삐뚤어진 모양으로 살았고, 살았을 텐데 흉터는 생겼지만 아프지 않게 되었고 편편하게 그 모양도 다듬어지고 있어요. 나도 준형 씨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요. 만약 다시는 세상을 못 보게 되면 내가 눈이 되어줄게요. 그 오빠랑 헤어진 이유... 우리 부모님 두 분 다 청각장애인이세요. 나를 좋아하지만 자기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아니까 어려운 길 가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요. 세상에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위로의 말을 해주는 사람도 많지만 어떤 사람들은 상관있다고 말하니까... 우리 부모님 때문에 준형 씨를 좋아한다거나 함께 하자고 말하는 거 아닌 건 알죠? 그냥 좋아졌고 그런데 이런 일 만났고 그럼 같이 가야 하는 거잖아요.”

“그 마음은 아는데...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내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요.”

“우리 부모님도 처음부터 장애인은 아니셨어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거잖아요. 만약 내가 그랬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장애인이 되었다고 사랑이 변할 수는 없어요. 그런 사랑이면 그건 사랑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고."

그는 몇 번의 수술에도 시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제일 힘들어했던 것은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파란 하늘도 예쁜 꽃도 아닌 그녀를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습니다.

함께 하는 그와 그녀 ⓒ최선영

밀어내고 또 거절했지만 그녀는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이 되어주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을 받아 든 그도 그녀를 더 많이 사랑합니다.

흉터로 남은 아픈 흔적까지도 안아주는 그와, 세상을 보는 그의 통로가 되어 준 그녀의 사랑은 더 단단하고 깊어집니다.

사랑하지만 사랑에 조건이 맞지 않으면 그 사랑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기에 사랑에 다른 단서가 붙어도 그 사랑을 지켜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선택은 지켜내는 사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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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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