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을 내다보는 은혜 ⓒ최선영

더위에 지친 거리를 보며 은혜는 오늘도 그를 생각합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이렇게 더웠는데...... 그날도, 그를 만난 그 여름에도.”

은혜는 혼잣말을 하며 여전히 더운 열기로 후끈거리는 거리로 나옵니다.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겁니다.

“나 마트 앞인데 뭘 좀 사갈까?”

“다 준비했으니까 그냥 와.”

“그래도... 과일이라도 살까?”

“아니, 그냥 와, 다 있어.”

빌라 앞에 도착한 은혜는 빈손으로 차에서 내립니다.

2층에서 들리는 가족들의 시끌 거림이 은혜의 귀를 즐겁게 합니다.

“우린 준비 다 됐어. 너도 얼른 가방 챙겨서 나와.”

언니는 은혜를 재촉합니다.

은혜는 가족들과 여행을 갑니다.

“이렇게 온 가족이 함께 떠나니 더 좋구나."

부모님은 매년 바쁘다는 핑계로 참석 못 하던 은혜가 함께 하는 것이 좋은지 입가에 미소가 환합니다. 초등학생 조카들도 이모가 함께 가서 좋다며 싱글벙글 거립니다.

“어디로 가는데요?”

“너 고등학교 때 갔던 ‘숲속 작은 마을’이라는 펜션 생각나? 계곡이 바로 아래 있어서 물놀이하기 좋았던 곳, 거기 리모델링해서 너무 예쁘게 해놨길래 거기로 가기로 했어.“

“......”

“표정이 왜 그래? 너 거기 엄청 좋아했잖아. 이번에 너도 같이 갈 수 있다고 해서 일부러 그쪽으로 잡았는데.”

“그곳은.. 그곳은......”

혼잣말을 하는 은혜의 심장이 뜨거워집니다.

그 여름 그를 만난 그곳으로 지금 은혜는 다시 달려갑니다.

7년 전.

“은혜 곧 고3 되는데 멀리 가지 말고 가까운 계곡 가서 발이나 담그고 오자.”

“왜!!! 아직 고2잖아. 가까운데 말고 멀고 좋은 데로 갈래.”

“이번에 네 언니도 바쁘잖아 아르바이트 때문에 휴가 길게 못 가.”

“흥~!!”

"가보면 너도 좋아할 거야."

2시간이 채 안 돼서 은혜는 시원한 계곡물이 찰찰 거리는 푸르름이 가득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적이 드문 곳이라 더 깨끗하고 좋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미 두 가정이 도착해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고 식사 자리도 함께 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희준 희명 쌍둥이네 와 고1 민정이네입니다.

민정이는 고3 언니와 대학 1학년인 오빠가 있다고 합니다

점심을 먹고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다 은혜가 과자를 가지러 펜션을 향해 종종걸음으로 걸어갑니다.

그때, 낯선 차 한 대가 보입니다. 차에서 내린 낯선 남자들.

민정이 오빠와 친구들이었습니다.

민준을 만난 은혜 ⓒ최선영

은혜의 눈에 들어온 한 사람. 왠지 그 사람이 민정이 오빠일 거라는 생각에 말을 건넵니다.

“저... 혹시 민정이 오빠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계곡에서 다들 물놀이하고 있어요.”

“네 알아요. 어머님이랑 통화했어요. 저희도 옷 갈아입고 가려고요.”

옆에 있던 통통해 보이는 남자가 대신 은혜의 말을 받습니다.

은혜는 고개로 알았다는 인사를 하고 과자를 들고 내려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계곡에서 만났습니다.

민정이 오빠 민준과 그의 친구들은 수영이 수준급이었습니다.

“언니 저 오빠들 꼭 수영선수 같다.”

“이런 데서 조금만 흉내 내도 잘하게 보이는 거야.”

“아닌데, 이런 데서 더 어렵다고 하던데.”

“몰라~ 잘하든 말든."

언니는 관심 없다는 듯 쌍둥이들과 다시 물놀이를 합니다.

"난 수영 잘하는 사람 멋있던데."

은혜는 혼잣말을 하며 민준을 봅니다.

해가 뉘엿거리는 시간이 되자 펜션으로 돌아온 그들은 저녁을 준비합니다.

은혜는 민준에게 자꾸만 시선이 갑니다. 유난히 말수가 적은 그는 늘 친구들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은혜는 민준이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들, 가족들이 민준이에게 말을 할 때는 천천히 또박또박하는 것을 보고 언니가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밤, 가족이 모여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엄마가 민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민정이 오빠가 청각장애인이래.”

“저희도 알아요.”

“너희도 알았구나. 어릴 때 열이 심하게 난 이후에 그랬다는데...... 정말 안됐어. 저렇게 착하고 잘생겼는데.”

다음 날 아침, 은혜는 산책을 나갑니다.

학교 갈 때는 알람이 울고 엄마가 소리를 질러도 일어나지 못했는데, 이런 날은 깨우지 않아도 눈이 떠지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며 초록이들의 향기를 마음 가득 담았습니다.

산책을 하다 민준을 만난 은혜 ⓒ최선영

머그잔을 들고 혼자 걷는 민준을 만났습니다.

“잘 주무셨어요?”

은혜는 천천히 또박또박 민준에게 아침인사를 건넸습니다.

“네 잘 잤어요?”

민준도 은혜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날 하루는 민준이만 졸졸 따라다니며 은혜는 즐거워했습니다.

그곳에서 돌아온 은혜는 민준과 메일을 주고받으며 좋은 오빠 동생으로 그 끈을 이어갔습니다. 은혜의 졸업식에도 대학 입학식에도 민준이 와서 축하해주었습니다.

“오빠, 나 오빠 많이 좋아해.”

은혜는 민준에게 그동안 차곡차곡 담아두었던 마음을 보였습니다.

민준은 은혜를 꼭 안아주었습니다.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던 민준은 그날 이후 은혜의 연락을 받지 않았습니다.

“나쁜 놈, 싫으면 싫다고 하던가. 왜 연락을 안 받는 거냐고. 그동안 좋아하는 것처럼 한 건뭐냐고. 지는 내가 싫은데 내가 좋다고 하니까 불쌍해서 안아준 거야?”

은혜는 여러 밤을 그렇게 민준을 원망하며 보냈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연락을 하고 찾아가기도 했지만 민준은 은혜를 만나 주지도 답장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민준의 친구 정수를 우연히 만나지 않았다면 계속 민준을 미워했을 텐데......

“민준이 은혜 너 많이 좋아했어. 처음 그 계곡에서 널 봤을 때부터.”

"그런데 왜......"

엄마는 계곡에서부터 은혜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민준을 엄마도 좋아했지만 이성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싫었습니다. 동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절대로 안 된다고 감정 키우지 말라는 부탁을 민준에게 했습니다.

민준은 딸을 생각하는 엄마의 걱정을 받아들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은혜의 고백 앞에 여러 날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많이 힘들었지만 은혜를 위해 깊어진 감정을 가슴에 묻고 은혜 곁을 떠났습니다.

모든 걸 알게 된 은혜도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엄마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에 민준을 향했던 마음을 접었습니다.

은혜의 접힌 마음은 그 누구를 만나도 펴지지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민준의 모습이 겹쳐졌습니다. 그런 자신이 싫을 때도 있었습니다.

“뭘 그렇게 깊은 사랑을 했다고.. 이러는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민준의 그림자는 늘 그 자리에 길게 늘어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를 처음 만난 그곳으로 다시 달려갑니다.

그는 그곳에 없겠지만 그의 흔적이 있는 그곳. 그래서 은혜의 심장이 뜨겁게 뛰고 있습니다.

“언니, 나 아직 심장이 뛰고 있어.”

“뭐? 심장이 뛰어야지. 당연한 거 아냐?”

“하여튼 결혼하고 나면 이성만 남는다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 이미 오래 전인데 아직도 그렇다니 놀라워서 그래.”

“그러게. 바보처럼 내 시간은 늘 그 자리에 있었나 봐......”

펜션에 차를 대고 내리는 순간, 은혜의 눈에 그가 들어왔습니다.

당황하는 눈빛으로 인사를 건네는 그의 품에 아가가 안겨 있고 옆에는 낯선 여자가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눈인사만 나누고 엇갈린 걸음을 옮겼습니다.

"괜찮아?"

"아니, 안 괜찮아."

언니가 건네는 말에 짧은 대답을 하고 가족들과 조금 떨어져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날 밤, 은혜는 잠을 잊은 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남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는데 막상 그런 그를 보고 사정없이 무너지는 자신이 싫은 밤이었습니다.

“잘 살고 있었네. 나만 이러고 살았어 바보처럼.”

은혜는 그를 담고 살았던 시간이 후회스럽기도 했습니다.

다음 날, 그때처럼 은혜는 혼자 산책을 합니다.

터벅이는 걸음이 몹시도 무거웠습니다. 더위에 힘들게 이리저리 누워있는 잔디를 보며 ‘지금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잊을 거야. 한 점도 남기지 않고 저 계곡에 다 쏟아 버릴 거야."

은혜의 발앞에 낯설지 않은 발이 다가옵니다.

그가 은혜 앞에 서 있습니다.

다시 만난 민준과 은혜 ⓒ최선영

“그때는 그게 널 행복하게 해주는 길이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널 보내고 내 인생은 늘 추운 겨울이었어.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이곳에 왔었어.뜨거운 계절에도 네가 없는 이곳은 그냥 겨울처럼 추웠어.”

은혜는 그의 말에 눈물이 났습니다.

어제 함께 있던 여자는 고3이라 그때 오지 못했던 민준의 다른 동생이었고 아가는 조카였습니다.

오지 못한 매제 대신 조카를 민준이 돌보느라 그 차에 있었고, 폰을 두고 떠난 탓에 일행을 먼저 보내고 다시 돌아온 것입니다.

만날 인연은 아무리 그 끈을 자르려 해도 다시 이어지나 봅니다.

단 한순간도 서로를 잊지 않았다는 말에 은혜의 엄마도 더 이상 그들을 막아서지 않았습니다.

무더운 열기가 가득한 계절, 그들의 사랑도 이 뜨거운 태양만큼이나 붉게 타오릅니다. 이 계절이 지나도 이들의 아름다운 사랑의 온도는 계속 뜨거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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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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