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와 서점 나들이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어린이로 자라난 이응이는, 어느 새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한 달쯤 지났을까?

이응이 학교에서는, <꿈 가꾸기 장>이라는 독서록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일 책을 읽고, 읽은 날짜와 제목, (약 20에서 25자 정도 쓸 수 있는) 저학년이 독서 감상을 쓰기에는 지나치게 작은 칸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형적인 초등학생 독서록이다.

아이와 함께 해 보니, 1학년이 이 작은 독서록에 자신의 느낌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담임선생님께서도 아이들이 책을 읽은 날짜와 책 제목 정도를 쓰게 하시고, 감상을 쓰는 것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응이와 반모임에서 만난 엄마들의 전언이다.

그러다 보니, 귀엽고 깜찍하며 서로서로 누가누가 잘 하나를 열심히 견주기 바쁜 꼬맹이 1학년 아이들 중에는, 시간이 갈수록, 집에 있는 전집류의 책 제목들을 하루에 몇 개씩이고 잔뜩 써내는 아이들도 있어서, 내실 없는 과열 경쟁이 일어나기도 하는 모양이다.

처음에 이응이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자신은 매일 단 한 권을 읽어도, 스스로 생각하고 열심히 말도 줄여 가며 심혈을 기울인 독서록을 작성하는데, 책 읽은 개수가 적다는 이유로, 아이들 사이에서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니, 나름으론 억울한 모양이었다.

뭐든지 잘 하고 싶은 아이, 이응이가 독서록을 보면서, 문득 자기보다 훨씬 앞서 나간 아이를 떠올리며 속상해 할 때마다, 나는 그 맘을 공감해 주며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응아! 엄마는, 네가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직접 골라서, 엄마랑 함께 읽고, 책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힘들어도 직접 네 손으로 느낌을 쓰는 그 과정을 얼마나 높게 평가하는지 몰라. 다른 아이들 4, 5개씩 책 제목만 써 오는 것에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어른들 중에도 하루에 책 한 번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응이는 매일 읽고 생각하며 쓰고 있잖아? 엄마는 **이 100개보다, 이응이 70개가 더 값지다고 생각해.’

사실, 이응이가 특히 신경 쓰는 아이 하나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심지어, 자신처럼 독서감상까지 쓰고 있는데도 자기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고 있다면, 남과 그렇게 비교할 필요 없다고 타일러 주었는데…

얼마 전 있었던 반모임에서 알게 된 사실. 그 아이는 월 25만원짜리 논술학원에 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아이에게 이 사실을 적나라하게, 혹은, 가치 편향적으로 말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이었기에, 그저, 친구와 그 엄마의 선택과 노력이 폄하되지 않도록 주의하는 선에서, 이응이에게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말해 주었더니, 이제는 독서록의 개수에 그다지 신경 쓰지는 않게 되었다.

사실, 독서록에 얽힌 이러한 아이들 사이의 다이나믹이 조금 재미있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서두에 주제 제시 에피소드로 지면을 할애했지만, 내가 쓰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응이의 독서록 '꿈 가꾸기 장'. ⓒ은진슬

어느 새, 내가 아이와 유의미한 언어적 상호작용을 하며 'Reading in the dark' 방식으로 책을 함께 읽은 지도 5년! 칼럼을 오래 읽어 온 독자라면, 내가, 또 우리 아이가, 이 어둠속의 책 읽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알 것이다.

시각장애 맘으로서 아이와의 특별한 독서 경험은 나와 내 아이에게 많은 행복감과 이채로운 관점과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요즘, 아이와 나와의 독서 다이나믹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응이는 유치원에서도 독립된 유치원 도서관을 가지는 행복하고 호사스러운 독서생활을 했었다.

초등학생이 되니 유치원 도서관보다 훨씬 큰 도서관의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이 그렇게도 재미있어 보이는지, 참새가 논밭에서 쌀알 물어 오듯, 수시로 책을 가져온다. 이제 엄마와 함께 하는 독서에서 좀 더 벗어나, 스스로 즐기고 혼자 읽는 독립적 독서로 아이의 독서 스타일이 자연스럽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매우 어린 나이에 한글을 깨쳤기에, 스스로 하는 독서를 매우 일찍 시작했던 아이였지만 이 상황은 아이에게 점자로 책을 읽어주는 일을 매일, 마치, 어떤 종교의식처럼 해 오던 엄마에게는 조금 더 큰 의미이자 변화로 다가왔다.

내가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자란 아이가, 어느 새, 스스로 좋아하는 스타일의 책을 고르고, 혼자 읽고, 좋았던 내용과 느낌들을 엄마에게 말해 주는 것을 들으며, 아이의 성장을 느끼는 행복감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는 부류의 질과 결이 전혀 다른 행복감이다. 마치, 별 기대 없이 열심히 납입했던 펀드에서 갑자기 기대하지도 않았던 고수익을 얻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아! 비유해 놓고 보니, 너무 속물적인가?^^)

반면, 한 편으로는 조금 서글픈 상실감이 찾아 오기도 했다. 저 아이가 읽는 많고 많은 책들에, 점자를 사용하는 시각장애 엄마인 나는, 이제 접근할 방법이 없으니, 그 간 오롯이 함께 읽고 말하고 느끼며 공유해 왔던 우리만의 아름다운 책읽기 세계의 면적이 점점 줄어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내 준 과제인 <꿈가꾸기장> 덕분에 아이와 매일 함께 하는 독서시간은 여전히 나에게 엄청나게 특별한 기쁨을 선물해 주고 있다.

그날 그날 아이가 읽고 싶은 책들의 범위는 훨씬 다양해졌으며,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읽어줄 수 있는 점자 형태를 띄고 있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이 일어났다.내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아이가 거꾸로 이제 나에게 자발적으로 책을 읽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행여나 아이가 나와 하는 독서를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겠다 싶어 내게 접근 가능하지 않은 책들을 읽을 때는 아이 혼자 읽은 후에, 나와 책 내용을 이야기 나누고, 필요한 경우 감상 쓰는 것을 돕겠다고 일러 두었었다.

그런데, 제법 글밥도 많고 장수도 많은 중편 동화책 정도를 엄마에게 읽어 주려면 8세 아이로서는 아직 조금은 힘들텐데도 불구하고, 아이는 자꾸 나를 불러서는 ‘엄마, 나랑 같이 꿈 가꾸기 장 해요. 내가 이 책을 읽어 줄테니, 잘 들어 봐요.’라며, 여전히 나와의 독서를 즐기는 것이 아닌가?

내가 몇 년 전, 이 지면을 빌어 'Reading in the dark'에 대한 칼럼을 썼을 때, 아이와 행복한 책 읽기를 해 오면서 시각장애 엄마로서 꿈꾸는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바람을 풀어 놓았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 ⓒ시공사

아이가 청소년기쯤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함께 좋아하는 책을 고르고, <책 읽어주는 남자> 속 미하엘처럼, 아들이 읽어 주는 책을 들으며, 함께 읽고, 공감하는 ‘시각장애 맘의 아이와 행복한 독서 판타지?’ 를 꿈꿨었다. 그런데, 나의 환상적인 바람이 이렇게나 빨리 이루어질 줄이야?

자신이 몇 년 간 들어 오던 엄마의 책읽기 스타일처럼, 또박또박 또렷한 발음으로, 인물의 감정까지 제법 잘 살려 가며 아이가 내게 책을 읽어 주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정말이지, 마음 가득 벅찬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카푸치노의 풍성한 우유거품처럼, 폭신폭신 몽글몽글 솟아 오름을 느낀다.

또한, 아이의 지적 능력과 공감능력, 생각의 깊이가 깊어짐에 따라,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엄마와 아이로서, 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역시, 성장하는 존재와 함께 오랜 시간 공들여 책을 읽는 부모들만이 느낄 수 있는 달콤한 열매이다.

지하세계를 정복한 쌍둥이의 우나프 형제. ⓒ한국톨스토이

라틴아메리카 신화 속, 지상에서 심한 공놀이를 해대는 통에 지하세계의 층간소음 유발자가 된 쌍둥이 우나푸 형제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파트 층간 소음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이야기 한다.

못말리는 음악가 트레몰로. ⓒ비룡소

악기 연주를 좋아하여 늘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트레몰로가 너무 시끄럽다며, 이웃에 사는 마녀가 그가 연주하는 음악소리를 각각 다양한 맛이 나는 음표로 바꿔 버리는 바람에 생기는 기상천해한 사건들이 펼쳐지는 이야기를 함께 읽으면서 엄마의 피아노연주는 어떤 맛이 날지, 자신의 오카리나연주는 어떤 맛이 날지 서로 이야기하며 재미난 상상의 나래를 펴 보기도 한다.

내 생각에 아이의 오카리나 연주는 풋풋하고 청량한 초록사과맛이 날 것 같고, 내 연주는(?) 씁쓸 쌉쌀 달콤한 얼그레이 가나슈 케이크 맛이 날 듯도 하다.

지금까지 두 번에 걸쳐 성장하는 아이와의 책 읽기에 대한 시각장애맘으로서의 유용한 팁, 불편과 애환, 보람과 기쁨에 대해 이야기 해 보았다.

시각장애 부모라면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아이 독서에 관한 고민이지만, 자신에게 맞는 나름의 방법들을 잘 활용하여아이와 즐기는 마음으로 진정성 있게 함께 책을 읽는다면, 부모와 아이 모두 행복한 독서경험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참고로, 요즘 호흡이 매우 긴 중·장편 동화나 인물 관련 책들을 많이 읽는 아이와의 독서를 위해 나는 원활한 독서자원 공급 차원에서 소리책을 조금씩 함께 읽으며, 아이에게도 흥미로운 독서방법이 될 수 있을지를 테스트 중이다.(제발, 어린이도서도 점자로 좀 많이 만들어 주세요. 점자동화 5년 읽고 나니, 이제, 도서관에는 읽을 책이 없어요!)

칼럼을 쓰면서 새삼 더 깊이 느꼈지만 끊임 없이 성장하는 매력적인 존재인 아이와 함께 하는 독서는 내 아이의 지성과 마음을 깊고 넓게 할 뿐만 아니라 부모인 우리 역시 아이와 함께 다시 한 번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육아하는 부모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멋진 특권이자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njoy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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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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