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확인하는 지은 ⓒ최선영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립니다.

"아..."

번호를 확인한 지은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옵니다.

이 시간에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에 불길한 예감이 스칩니다.

"여보세요."

"이현기 님 보호자분 되시죠. 지금 오셔야겠어요."

급하게 내몰린 차는 병원 앞에 세워졌고 지은의 걸음은 오늘따라 유난히 엇갈립니다.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선 지은의 눈에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들어하는 아빠의 모습이 먼저 들어옵니다.

"아빠 괜찮아요?"

아빠는 대답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지은을 바라봅니다.

"저녁 거르고 계시다 배고프다고 하셔서 밥 드렸는데 갑자기 이렇게 안 좋으시네요."

간병인의 말에 지은은 명치끝이 쓰리고 아팠습니다.

지은이 아빠의 야윈 손을 만지작거리며 아빠를 봅니다.

아빠도 지은을 지긋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요. 거친 숨소리가 조금 자자들었습니다.

식어진 밥과 국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따끈하게 데웠습니다.

한 숟가락도 체 뜨지 않은 체 옆에 밀어두었던 밥을 다시 아빠 앞에 들고 왔습니다.

"아빠 밥 드실래요?“

아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빠에게 밥을 떠먹이는 지은 ⓒ최선영

국에 말아서 후루룩 뚝딱 해치우던 아빠는 국물에 촉촉하게 젖은 작은 밥알을 다 넘기지 못하고 입안에서 우물거리기만 합니다.

"먹기 힘들어요? 죽 드릴까요?"

지은이 어떻게든 밥을 드시게 하고 싶어 하자 아빠는 있는 힘을 다해 입안에 있던 밥알들을 목구멍으로 넘겼습니다.

그리고 "아--" 하며 입을 벌려 다 먹은 것을 지은에게 보여줍니다.

"잘했어요."

지은이 미소를 보내며 아빠를 칭찬하자 아빠도 지은을 향해 작은 미소를 보냅니다.

"이제 괜찮은 거죠?"

아빠는 고개를 끄덕여 보입니다.

"놀랐잖아요."

지은이 숟가락을 또 떠서 아빠 입에 넣어드리자 아빠는 이번에도 온 힘을 다해 밥알을 넘깁니다.

물컵의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자 물도 한 모금 마십니다.

아빠 기운 차리라며 아빠가 좋아하는 두부와 계란찜을 새 모이만큼이나 작게 떠서 밥알이 몇 개 올려진 숟가락 위에 얹었습니다.

아빠는 이번에는 안 먹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빠 한 숟가락만 더 드세요. 그래야 기운이 나죠."

지은의 간절한 눈빛에도 아빠는 더 이상 못 먹겠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한 숟가락만 더 드시지.”

“조금 있다...”

아빠는 한 숟가락만 더라고 내미는 지은의 마음을 조금 옆으로 밀어둡니다.

“생각나세요?”

“뭐?”

“어린이날... 오리 배.”

“아.. 오리 배랑 짜장면?”

“네”

지은이 4살 되던 해 어린이날 아빠는 살짝 지은 만 데리고 나와 지은이를 위한 어린이날 이벤트를 해주었습니다.

다리가 불편해진 지은이는 아빠의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딸을 원하던 아빠는 내리 아들만 둘을 낳고 늦둥이 지은이 태어나자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미스코리아를 시키겠다고 생각한 아빠는 기어 다니면 다리가 곧지 않을 수도 있을 거라고 기어 다니지도 못하게 하며 안아키웠습니다.

걸음마를 아장거리기 시작하자 승마를 가르치겠다고 승마장을 찾아다니며 말과 친해지도록 말을 만지게도 했습니다. 그런 지은이 뒤뚱 오리 흉내를 내며 종종걸음을 하던 2살, 어린이날. 온 가족이 즐거운 나드리를 한 그곳에서 사고가 났습니다. 지은의 장애를 아빠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미스코리아를 만들겠다는 꿈도 승마를 시키겠다는 희망도 사라졌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오빠들의 뒤를 아장거리며 아이스크림을 사러 가던 딸의 모습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아빠는 딸의 사고를 엄마 탓으로 돌리며 힘든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지우, 지현에게도 그날 이후 아빠는 덤덤해졌습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할수록 자꾸만 아빠는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엄마에게 표현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그 마음을 지켜보는 엄마는 아빠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인 지우와 지현도 그날 지은의 사고 이후 웃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어린이날도 어버이날도 그날 이후 그들에게는 잃어버린 시간이 되었습니다.

“아빠!”

“응 우리 딸 왜?”

“지은이 아파요.”

“아프다고?”

놀란 아빠는 지은의 머리를 짚어봅니다.

“아니, 아니, 몸이 아픈 거 말고 마음이 아파요.”

“마음이? 왜?”

“오늘 어린이날이라고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말을 하다 고개를 숙이는 지은을 보는 아빠는 그제서야 딸의 장애를 슬퍼하는 것 대신 그 장애를 아빠가 먼저 받아들이고 지은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게 된 지은은 장애인이기 전에, 아픈 손가락이기 전에 그냥 딸이었습니다.

사고 전이나 사고 후나 그냥 딸이었고 이 땅에 많은 어린이들처럼 그저 어린이날을 기다리는 아이였습니다.

아빠는 지은을 위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린이날을 선물해주고 싶었습니다.

지은을 안고 이른 아침 집을 나왔습니다.

향기 가득한 꽃들의 미소를 보여주고 햇살이 방긋거리는 강변에는 달콤한 솜사탕과, 바람에 흔들거리며 춤을 추는 풍선들의 몸짓이 요란했습니다.

오리 배를 탄 지은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보입니다.

활짝 웃고 있는 지은 ⓒ최선영

“그렇게 좋아?”

“네^^”

진작 어린이날을 챙겨주지 못한 것이 아빠는 미안했습니다.

“이제 안 아파?”

“아니, 아직 조금 아파요. 짜장면 먹으면 다 나을 것 같아요.”

4살 지은은 자장면 한 그릇을 받아들고는 오물오물 잘도 먹습니다.

“배부르면 그만 먹어도 돼.”

“아니, 다 먹을 거예요.”

“허허, 녀석.”

그날 이후 아빠는 지은을 안고 때로는 업고 다니며 세상구경을 시켜주었습니다.

지은이 5살이 되던 어린이날도 아빠는 이른 아침 지은을 데리고 집을 나왔습니다.

“아빠,”

“응. 왜?

“엄마랑 오빠들도 같이 가면 좋겠어요.“

“왜? 아빠랑 둘이 재미없어?”

“아니, 좋은데 우린 가족인데 같이 재미있어야 되는 거잖아. 그런데 맨날 아빠는 지은이랑만 다니잖아. 싫은 게 아니라 마음이 아파. 텔레비전 보면 가족들 같이 다니잖아.“

5살밖에 안된 어린 지은의 깊은 마음을 들여다보며 아빠는 생각했습니다.

지은을 향한 꿈이 달라져야 했고 다른 길을 찾아봐야 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딸입니다. 지우 지현도 소중한 아들들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힘들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날의 악몽을 꾸고 있는 아내의 눈물이 보였습니다. 위로해주고 당신 때문이 아니라고 토닥여주지 못했던 시간들이 많이 미안했습니다.

“그래 우린 가족인데.....”

지은이를 안고 아빠는 다시 집으로 들어갑니다.

식탁에 덩그러니 앉아 훌쩍이고 있던 엄마와 아직 자고 있는 지우 현우를 깨워 함께 나왔습니다.

그날 지은이는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 다 먹었습니다.

짜장면을 먹고 있는 지은 ⓒ최선영

오빠들이 장난삼아 뺏어 먹으려 하자 허겁지겁 욕심꾸러기처럼 다 먹어버렸습니다.

아웅다웅 티격태격하며 냠냠 먹는 아이들 모습에 엄마는 눈물을 흘렸고 아빠는 이제야 이런 시간을 만든 것이 또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어버이날, 지은은 오빠들과 함께 카네이션을 만들어 아빠 엄마 가슴에 달아드립니다.

지은이 사고 이후 처음으로 엄마가 웃음을 보인 날입니다

지우와 지현의 다시 찾은 미소, 지은의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보며 아빠는 깨달았습니다. 지은에게 필요했던 것은 건강한 예전의 다리가 아니라 가족의 행복이라는 것을.

승마 대신 아빠는 지은에게 크러치를 사용해서 걷는 법을 가르쳤고, 미스코리아가 되게 하려고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도 못하게 했던 아빠는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라며 책을 한 아름 안겨주었습니다.

이야기 나누는 아빠와 지은 ⓒ최선영

“아빠 그날 짜장면 곱빼기 먹고 배 터지는 줄 알았어요.”

“허허, 그래도 소화 잘 시켰잖아. 짜장면 먹고 싶네. 우리 지은이가 잘 먹던 짜장면.”

“저도요, 아빠랑 먹던 짜장면도 먹고 싶고, 오리 배도 다시 타보고 싶어요. 그런데 이렇게 밥도 잘 못 먹고 아프면 안 되잖아요."

아빠는 밀어두었던 식판을 당기며 입을 벌립니다.

지은이 떠 준 밥 한 숟가락을 꼭꼭 씹어 꿀꺽 넘깁니다.

그리고 아빠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위독하다던 아빠는 다시 기운을 차리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이날에 함께 짜장면을 먹었고 어버이날은 온 가족이 오리 배를 타러 갔습니다.

짜장면과 오리 배 ⓒ최선영

5월 5일은 훌쩍 자라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지은을 챙겨주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 담긴 날입니다.

5월 8일은 언제나 아빠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지은에게는 간절함이 묻어있는 날입니다.

지은의 장애를 마주할 수 없었던 힘든 시간을 뒤로하고 딸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다시 찾은 이 가족의 행복이, 지은의 바람처럼 오래 이어지기를 두 손 모아 봅니다.

5월 가정의 달, 우리가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이고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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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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