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있는 일의 특성상 담당자들이 작성한 사업계획서나 제안서를 검토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성향 상 계획서들에 대해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가며 좀 더 마음에 드는 표현들을 찾고 실무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면 본래 의도했던 내용으로 수정을 한다.

그런데, 실무 경험이 많지 않은 담당자들이 작성한 계획서는 수정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경우도 있다. 이런 계획서를 붙들고 일일이 수정을 하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흘러가 버리기도 한다. 한참 집중한 끝에 수정을 다 마치고 나면 차라리 그냥 처음부터 새로 작성을 하는 게 더 빠르고 수월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생각은 비단 계획서 검토에서만 드는 것은 아니다. 접근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상황에서 이런 느낌을 받곤 한다.

새로운 제품, 새로운 도로나 건축물 등이 등장하고 나면 다수에 속하는 비장애인들이 실컷 그것들을 향유하고 몇몇 장애당사자들이 그러한 문물을 접해보기 위해 도전과 좌절을 겪고 난 후 접근권 보장에 대해 주장하게 된다.

그렇게 접근성 보장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일정 수준 이상 커지면 그제야 사후약방문식의 대책들이 나오곤 한다. 결국 처음부터 접근성을 고려하고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야만 하는 결과가 초래될 뿐만 아니라 장애당사자들에게 충분한 편의성을 제공해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 이러한 예로 패스트푸드점에 무인주문기 도입에 대한 우려를 담은 글을 적었는데 그 후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에 걱정하던 내용들이 현실이 되어 가고 있어 좀 더 이야기 해 볼까 한다.

직장인들이 많이 하는 사소한 고민들 중 하나가 점심에 무엇을 먹을지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들을 덜어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메뉴를 판매하기도 하고 가격도 저렴해 지갑걱정을 줄여주기도 하는 곳이 김밥전문점일 것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복지기관 근처에도 자주 가는 김밥전문점이 하나 있다. 시각장애인 복지기관 인근에 있기에 기관을 찾는 시각장애인들도 이 매장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시각장애인 고객을 자주 접하다보니 매장 종사자들도 시각장애인에 대한 응대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시각장애인 끼리도 편하게 방문하곤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음식점도 이제는 맘 편히 혼자 가거나 시각장애인들 끼리 가서 식사를 해결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몇 달 전부터 매장에 무인주문장치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열 평 내외의 조그만 매장인지라 주문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았기 때문에 도입되었다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아마도 최저임금 인상에 대한 인건비 부담으로 인원감축 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접근성이 고려되지 않은 키오스크가 이제는 동네 분식점까지 보급되기 시작해 시각장애인, 노인 등은 혼자 힘으로 간단한 김밥도 사먹기 어려워져 버린 것이다.

김밥전문점에 설치된 주문용 KIOSK. ⓒ조봉래

키오스크(KIOSK)보급으로 인한 생활 속 어려움은 여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십분 양보해 김밥전문점이야 영세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곳이기에 접근성에 대한 고려를 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해 줄 수도 있다.

그런데 월드베스트를 표방하는 대기업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며칠전 지인이 핸드폰 액정이 파손되어 대기업의 서비스센터를 방문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서비스 접수창구가 있어 그곳에서 접수원을 통해 서비스를 신청했던 것에 반해 지금은 단말기가 설치되어 있어 그 곳에서 자가 접수를 해야 했고, 그 단말기는 음성지원이나 글자확대 등 대체수단이나 접근성 지원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단말기 옆에 안내요원들이 서 있고 조작이 미숙한 이들에게는 일일이 접수를 도와주고 있었다지만 새로운 시스템에 다수의 사람들이 적응을 마친 이후에도 그렇게 인력을 배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다.

결국 시각장애인이나 노인 등은 고장 난 가전제품조차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수리를 의뢰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제품을 구입하며 지불한 비용에 해당 기기의 수리 등을 보증하는 비용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서는 또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도움을 요청해야만 하는 것이다.

AS센터의 셀프접수용 단말기 모습. ⓒ조봉래

AS센터의 셀프접수용 단말기 화면. ⓒ조봉래

결국 영세자영업자, 국내 최고 수준의 대기업 할 것 없이 인건비 절감 등을 이유로 키오스크와 같은 새로운 기기들을 실무에 적용하고 있고, 그 확산 속도는 최저임금 인상 등과 맞물려 상상이상으로 빠른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미 우려 섞인 지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접근성에 대한 아무런 고려 없이 다양한 형태의 키오스크 기기들이 널리 보급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누군가는 분식점과 대기업 가릴 것 없이 사용되는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게 되고 그들 중 누군가 인권에 대한 민감성이 있는 이들이 문제를 제기하게 될 것이고, 그러한 문제제기가 쌓일 대로 쌓이고 나서야 마지못해 접근성에 대해 검토하는 시늉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중 상당수는 이미 보급된 기기에 해당 기능을 적용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댈 것이고, 극 소수는 억지로 끼워 맞추기식 접근성 지원 기술을 적용하여 실제의 편이성과 거리가 멀지만 법적 문제는 피할 수 있는 납득하기 어려운 형태의 기기를 출시할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도 틈새시장이라고 키오스크 제작업체나 도입 기업 등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접근성 관련 기술을 비싼 가격에 팔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무수히 많은 문물의 등장에서 우리는 접근성보장과 관련하여 지겨우리만치 반복적인 과정을 되풀이해 오고 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의 불편과 엄청난 시간과 비용의 낭비를 거듭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접근성은 사후약방문이 원칙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동안 이러한 행태로 인해 우리 사회가 허비해야 했던 많은 비용과 노력을 고려해 볼 때, 그 설계나 구상 단계에서부터 접근성에 대해 고려하지 않으면 그 문물이 세상에 유통조차 될 수 없도록 하는 강력한 법적제재까지 검토해 보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이대로 방치할 경우 인공지능 등 급격한 사회변화를 초래할 기술들과 제품들의 도입 과정에서 우리 사회는 접근성 보장을 위한 뒤늦은 대응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낭비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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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봉래 칼럼리스트 나 조봉래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보조공학부를 총괄하며 AT기술을 이용한 시각장애인의 정보습득 향상을 위해 노력해 왔고, 최근에는 실로암장애인근로사업장 원장으로 재직하며 시각장애인의 일자리창출을 위해 동분서주해 왔다. 장애와 관련된 세상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소홀히 지나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예리한 지적을 아끼지 않는 숨은 논객들 중 한 사람이다. 칼럼을 통해서는 장애계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나 놓치고 있는 이슈들을 중심으로 ‘이의있습니다’라는 코너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해 갈 계획이다. 특히, 교육이나 노동과 관련된 주제들에 대해 대중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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