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경주 지진 이후,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지진 그 후’를 취재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그중에 매사를 지진에 대한 두려움으로 그에 대비하기 위해 초집중하며 살고 있다는 경주 사는 한 주부의 인터뷰가 인상 깊었다.

지진 때문에 매사에 전전긍긍하고 사는 그녀를 보고 사람들이 그런단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다 지난 일인데 뭘 아직도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그런 무심한 비아냥을 들을 때마다 자기가 너무 예민한가, 정상이 아닌가 싶어진다는 것이다.

그 후, 포항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지진현장 사진을 뉴스에 제보한 한 제보자는 그렇게 말했다. 경주 사람들 무섭다 무섭다 하는 거 보면 뭐 그리 무섭노 했는데 막상 내가 당하고 보니 정말 무섭더라고...

그 제보자의 인터뷰를 듣는데 문득, 크흑... 헛 웃음이 났다.

자기가 닥친 일이 아니면 저리 무심했어도 되나? 싶어서...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건 그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

어디 지진 소식뿐이랴. 수많은 사건 사고가 매일매일 일어나고 우리가 무심한 사이, 시리아의 어딘가에서는 무고한 난민 아이들이 전쟁으로 죽어가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역 리프트 사고로 죽음에 이른 안타까운 장애인의 소식도 듣지 않았던가. 그럴 때 나는 과연 어떤 표정으로 그 소식을 접하고 있나.

소설 <아몬드>가 그런 내 모습을,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손원평 소설 <아몬드>, ⓒ네이버 책

알렉시티미아, ‘감정표현 불능증’이란 이 낯선 이름의 장애를 가진 소년 선윤재가 소설 <아몬드>의 주인공이다. 알렉시티미아는 아동기에 정서 발달 단계를 잘 거치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 혹은 선천적으로 편도체의 크기가 작은 경우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선윤재는 바로 그 아몬드처럼 생긴 편도체의 크기가 선천적으로 작아서 생긴 알렉시티미아 증후군을 가졌다. 그 때문에 윤재는 공포도, 두려움도, 슬픔도 그 어떤 다양한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매사에 담대하고 용감할 수 있으니 좋을까? 아니다. 공포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위험한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필요한 우리 몸의 기본적인 방어체계다. 윤재는 그 기본적인 방어체계가 작동하지 않아서 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것은 슬픈 거야, 이런 건 아픈 거야...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에게 엄마는 일일이 상황에 따른 감정 매뉴얼을 훈련시킨다. 그러면서 그녀가 늘 윤재에게 당부하는 것은, 튀지 않을 것, 남들과 비슷해질 것. ..소위, ‘정상성’을 유지할 것! 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정상성’이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을 규정하는 이는 누구인가.

TV 화면을 가득 채운 그 어떤 나라의 전쟁화면. 폭격 속에서 두 다리와 한쪽 귀를 잃고 울부짖는 어느 소년의 모습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윤재는 의문이 든다. 자기는 느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들이 얼마나 아플 지는 안다. 그런데 그런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정상적이라는 저 사람들은 느끼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웃을 수조차 있는 걸까...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소설 속, 윤재의 생각이다.

사람들은 윤재를 ‘정상적’이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그를 싸이코패스라 불렀고 괴물이라며 외면했다. 그러면 윤재와 다른, 소위 ‘정상적’인 그들은 과연 ‘정상적으로’ 살고 있는가?

윤재는 그 감정을 ‘아는 것만으로도’ 부채감을 느끼고, 행동해야 했고, 인간으로서 또 다른 인간에 대한 연대와 의무감을 느꼈다. 그런데 ‘정상적’이란 사람들은 무자비한 전쟁뉴스 화면 앞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그저 ‘정상적으로’ 느끼기만 할 뿐. 쉽게 잊어버리고 행동하지 않았다. 자, 그럼 무엇이 ‘정상적’인 걸까?

다른 지역의 지진을 보며 뭐 그리 무섭노 했다는 사람들, 세월호 유족을 보고 지겹다고 이젠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들, 심지어 그 애끓는 유족 앞에서 피자와 짜장면을 보란 듯이 먹어대며 ‘폭식투쟁’이란 말 같지도 않은 말로 ‘투쟁’이란 말을 모독하는 사람들, 혹은 불행한 현장에 내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가슴 쓸어내리며 안도하고는 곧 잊고 마는 사람들...

모두 윤재의 눈으로 보면 적어도 ‘정상적’이지 않다!

장애인이 지나가는 걸 보면 꼴 보기 싫고 역겨워서 때리고 싶어진다는 사람들이 있다. 실제로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유도 모른 채 무자비한 폭력을 당한 장애인들도 여럿 있다. 장애인이 역겹다는 사람을 보면 ‘정상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쾌감 내지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지극히 ‘정상적’이고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그렇게 명백히 보이지 않는 것들, 애매모호한 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는가.

가령, 경사로를 설치하지 않은 식당이나 가게들을 운영하는 사장님이나 바쁘다는 이유로 장애인에게 편의시설을 양보하지 않는 사람들 같은 경우 말이다.

그럴 수도 있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그 내면에는 사실 차별적인 상황을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둔감함이 자리한다. 그 둔감함은 더 많은 차별적 상황을 묵인하게 만들 것이고 그럼으로써 차별과 폭력적 상황은 계속해서 악순환되고 공고화될 것이다.

배고픈 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 식당이 없어서 제때 음식을 못 먹는 상황, 바쁜 장애인이 아무도 비켜주지 않는 편의시설 때문에 제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는 상황을 지나치고 묵인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얼마나 폭력적이기까지 한가. 그러므로 무관심과 둔감함도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된다. 윤재의 눈으로 보면 이 모두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연 나의 편도체, 나의 아몬드는 안녕한가?

다른 것을 ‘비정상적’이라고 매도하는 폭력적인 ‘정상성’의 강요가 아니라 윤재가 의미하는 공감과 연대로서의 ‘정상성’으로 말하자면 과연 나의 ‘정상성’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윤재의 물음을 깊이 되새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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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경 칼럼리스트 ㅅ.ㅅ.ㄱ. 한 광고는 이것을 쓱~ 이라 읽었다. 재밌는 말이다. 소유욕과 구매욕의 강렬함이 이 단어 하나로 선명하게 읽힌다. 나는 내 ‘들여다보기’ 욕구를 담는데 이 단어를 활용하겠다. 고개를 쓰윽 내밀고 뭔가 호기심어리게 들여다보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아주 사소하고 가벼운 동작, 쓱... TV, 영화, 연극, 책 등 다양한 매체가 나의 ‘쓱’ 대상이 될 것이다. 그동안 쭈욱 방송원고를 써오며 가져 왔던 그 호기심과 경험들을 가지고... (ㅅ.ㅅ.ㄱ. 낱말 퍼즐은 읽는 분들의 몫으로 남겨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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