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이라는 숫자는 필자에게는 매우 특별하다. 사회생활을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하지마비의 척수장애인이 된 해이기 때문이다. 20대의 꽃다운(?) 나이였다.

듣도 보도 못한 휠체어가 나의 평생 동반자가 된 해였고,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를 한 건강했던 몸이 운동신경과 감각신경이 마비되어 돌이 지난 아이보다 못한 신변처리 능력을 갖게 된 해였다.

1987년 8월의 뜨거웠던 여름, 입원을 했던 신촌의 세브란스병원은 매캐한 최류탄 가스 냄새로 넘쳐나던 곳이었다. 수술 이후에도 가족들은 연일 눈이 충혈되어 눈물을 흘리며 다니면서 필자에게는 독한 최류탄 가스 때문이라고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필자가 평생 휠체어를 타야하고 걷지도 못하는 척수장애인이 됐다는 것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1987년은 필자에게는 가슴 아픈 시기로 기억이 되는 역사적인 시간이었다. 강산이 세 번 바뀐다는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무감각해졌다 했는데 최근 ‘1987’이라는 영화를 본 후에 불현듯 과거가 생각났다.

필자도 이 영화를 감명 깊게 보았다. 이 역사적인 시기를 함께 한 국민들이라면 함께 분노하고 눈물을 훔치고 의지를 다지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오는 내내 필자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 어지러웠던 시기에 나는 무엇을 했나’라는 죄책감이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고초를 겪었고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놓았고 그 역사의 현장에 함께 했었다. 몰랐다는 것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한 시대를 공유하면서 몰랐다는 것은 면죄부가 아니다.

영화 ‘1987’ 포스터(좌)와 ‘장애인 이동권 투쟁보고서 - 버스를 타자!’의 한 장면(우). ⓒ네이버 캡쳐

장애인이 된 후에도 사실 장애계를 잘 몰랐다. 사고 이후에도 직장생활을 계속했던 필자는 업무에 시달리면서 사는 평범한 회사원에 불과했다. 다른 장애인들도 다 이렇게 사는 줄 알았다. 필자처럼 일상의 쳇바퀴를 돈다고 생각했다.

2009년인가 우연히 혜화동에 있는 한 장애인단체에 장애 관련 강의를 들으러 갔다가 사무실 복도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었다.

목에 쇠사슬을 두르고 지하철 철로에서 절규하는 장면이었는데 너무 충격적이었다. 장애인의 이동권을 위해 투쟁하는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필자가 바쁘게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동안 누군가는 사회변화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 전에는 잘 몰랐던 전동휠체어 보급 사업, 지하철 엘리베이터·저상버스·장애인콜택시 등 이동권 확대,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 시행,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차법) 제정 등 장애인들의 삶의 개선을 위한 행동들이 있었다. 수많은 희생과 투쟁의 노력으로 변화를 이루어낸 일들이다.

‘내가 이 사회에 빚을 지고 있었구나.’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빚진 마음이 하던 사업을 뒤로 하고 한국척수장애인협회로 들어오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때가 2009년 후반기였다. 이후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곳을 다니면서 배우고 또한 척수장애인의 어려움과 개선을 위해 자그마한 노력을 하고 있다.

1987년.. 장애운동.. 우리는 많은 이에게 빚을 지고 산다. 그 빚진 마음에 오늘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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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척수장애인협회 정책위원장이며, 35년 전에 회사에서 작업 도중 중량물에 깔려서 하지마비의 척수장애인 됐으나, 산재 등 그 어떤 연금 혜택이 없이 그야말로 맨땅의 헤딩(MH)이지만 당당히 ‘세금내는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대한민국 척수장애인과 주변인들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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