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월27일, 소련군이 독일 점령지 폴란드의 한 수용소 앞에 도착했다. 철조망 안으로 들어선 순간, 무수한 참상을 겪은 군인들조차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7,650명의 유대인들이 해골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불탄 유해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이미 처형당한 자들의 옷 120만 벌과 머리칼 7.7톤도 발견되었다. 나치 독일의 인종학살 현장 아우슈비츠가 이렇게 그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나치는 유럽 유대인 900만 명 중 600만 명을 학살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인종청소(제노사이드) 사례다. 2005년 12월 유엔 총회는 붉은 군대가 아우슈비츠를 해방한 날을 기려 매년 1월27일을 ‘홀로코스트 추모일’로 지정했다. 다시는, 이런 죄악을 짓지 말자는 경종이자 죽은 자들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는 게 있다. 유대인은 맨 나중에 학살된 집단이라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자, 장애인, 동성애자, 로마니(집시)가 유대인보다 먼저 제거되었다. 특히, 장애인 집단학살 시스템은 훗날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전형이 된다.

홀로코스트 소각로 모형도 ⓒ야드바쉠 홀로코스트 기념관

단종, 안락사, T4 작전, 그리고 홀로코스트

나치는 1931년 10월부터 히틀러 유겐트를 조직하여 ‘육체적, 도덕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청소년들을 의무적으로 가입시켰다. 장차 일어날 전쟁에 대비해 충성스러운 장교를 육성하고, 독일 국민들에게 아리안 혈통의 우수성을 선전하기 위해 이런 청소년들의 이미지를 이용한 것이다.

그럼, ‘육체적, 도덕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불행히도, 이들은 단종이나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나치는 1933년 7월14일 유전병후손예방법을 제정하고 “독일 민족공동체의 순혈성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단종’시켰다. 유전 가능성이 있다고 간주된 정신병, ‘백치’, 농, 맹, 신체기형이 주요 표적이었다.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전쟁 물자를 비축해야할 상황에서 장애인들에게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시점이었다.

장애인이 과도한 재정 부담이 된다고 선전하는 나치의 포스터(1938년). 맨 위에 한 장애인을 평생 돌보는데 드는 “6만 제국마르크”가 적혀있고, 그 아래 “국민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의 돈이기도 합니다”라고 쓴 붉은 글씨가 보인다. ⓒ윤삼호

급기야, 나치는 장애인을 ‘안락사’의 제물로 삼았다. 우선, 어린 아이들부터 시작했다. 히틀러는 1939년 10월 장애 유아 안락사를 명령했다. 3세 이하 중증장애 유아들을 지정병원에 수용한 다음 방치하라고 했다. 아이들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나갔고, 그래도 살아남으면 주사를 맞았다. 의사들은 루미날이 효과가 없으면 몰핀-스코폴라빈을 치사량까지 주사하였다. 비판 여론이 일자 1941년 8월24일 이 조치가 공식 중단되었는데, 비공식적으로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담해진 나치는 안락사 대상을 넓혀 갔다. 처음에는 17세 이하 장애 청소년들이, 나중에는 모든 연령대 장애인들이 포함되었다. 나치는 이 프로그램을 ‘T4 작전’이라 했는데, 작전본부가 베를린의 티어가르텐(Tiergarten) 4번지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의 장애인 학살 방식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이었다. 수 십 명을 ‘샤워장’ 앞에 집결시키고 알몸 상태로 대기시킨다. 하나같이 빡빡머리이고, 금이빨이 있는 자들은 몸에 별도 표시를 한다. 머리칼은 카펫과 가발을 만드는 공장으로, 금은 군수공장으로 보내기 위해서다. 한쪽에 수북이 쌓여있는 옷가지와 신발은 다음에 죽을 자들에게 재활용된다.

‘샤워장’ 바닥에는 매끈한 도기가 깔려 있고 천장에는 샤워기들이 가지런히 달려 있다. 살인자들이 ×자형 레버를 돌려 육중한 출입문을 잠그면 샤워기에서 일산화탄소 가스가 흘러나온다. 희생자들이 온몸을 쥐어뜯고 헐떡거리며 죽어가는 동안 스피커에서 바그너의 음악이 웅장한 리듬을 타고 흐른다. (철저한 민족주자 바그너는 히틀러의 우상이었고. 그의 며느리는 히틀러가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쓸 때 모든 재정을 지원했다.)

1시간 동안 독가스를 살포하고 나서 30분 동안 밖으로 배출시킨다. 하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착용한 자들이 뒷문으로 들어와서 시신을 하나씩 끌고 밖으로 나간다. 질식사한 탓에 모두 입을 쫙 벌리고 퀑한 눈을 부릅뜨고 있다. ‘샤워장’ 밖으로 나가자마자 시신은 벌겋게 달아오른 소각로에 던져지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홀로코스트’는 그리스어로 ‘불에 태운 제물’이란 뜻이다.) 나치는 이런 식으로 20만 명이 넘는 장애인들을 학살하였다.

장애인 학살이 끝날 무렵인 1942년 1월 20일, 아이히만을 위시한 나치 고위관료들과 히틀러 친위대장 하이드리히가 베를린 근교에 모였다. 유럽 내 모든 유대인을 강제수용소로 이주시켜 ‘최종해결’하는 방안이 그 자리에서 결정되었다. 이 때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는데, 여기에 장애인 안락사 시스템이 고대로 적용되었다. 다만, 살상용 가스가 일산화탄소에 더 치명적인 치클론 B로 바뀌었을 뿐이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주목할 대목은, 나치 독일이 장애인과 유대인을 학살한 이유가 달랐다는 점이다. 익히 알다시피 유대인 학살의 배경은 순혈주의와 인종주의라는 정치적 동기다. 아리안 독일에 어울리지 않는 ‘부적절한 자들’을 제거한 것이다. 반면, 같은 혈통의 장애인들을 학살한 까닭은 독일 사회의 합리성, 효율성, 생산성 때문이다. 노동할 수 없는 자들, 참전할 수 없는 자들, 그래서 국민의 세금을 축내는 자들, 한 마디로 ‘살 가치가 없는 생명들’을 제거해야 국가 효율성이 극대화된다는 논리였다.

효율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장애인 학살의 역사가 경종을 울린다. 장애 태아 낙태로 이어지는 산전검사가 일반화되어 있고, ‘연명치료중단’이란 이름으로 소극적 안락사가 합법화되었다. 특히, 장애인 수용시설은 발달장애 어린이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매일 향정신성 의약품을 먹여 생명을 단축시키고 있다. 방식이 더 유연하고 더 은밀해 졌을 뿐, ‘살 가치 없는 생명’ 이데올로기는 우리 안에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매년 1월17일, 전 세계 여러 나라들이 홀로코스트를 추모한다. 제주 4.3 학살, 보도연맹 학살, 한센인 학살, 우리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을 떠올리자면 우리도 학살의 역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우슈비츠 기념관 벽면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글귀가 있다. 아무도 홀로코스트를 추모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이 말은 먼 나라의 이야기인가.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몇몇 장애인 단체 활동가를 거쳐 지금은 부산에 있는 자립생활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장애화의 정치>, <장애학: 과거, 현재, 미래>, <동정은 싫다>, <장애와 사회, 그리고 개인> 같은 장애학 서적을 번역했습니다. 장애학 특히 장애 역사에 관심이 많고, 지금도 틈틈이 자료를 읽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류 학계가 외면하는 장애인의 역사를 현재와 연결하여 유익한 칼럼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