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받는 주리. ⓒ최선영

열린 창틈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새들의 속삭임을 들으며 휴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즐기는 주리에게 전화가 옵니다.

"주리야, 소개팅 어때?"

"소개팅? 완전 좋지^^"

소개팅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주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케이를 합니다.

아마 이대로 있다가는 연애세포가 다 죽어버릴 것만 같은 위기의식이 스믈 거리던 차에 소개팅 제안은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소개팅할 상대가 약간의 장애가 있어. 전맹은 아니고 약시 정도..."

"음... 뭐 나야 늘 자유로운 연애를 주장하잖아. 시각장애가 뭐 별문제가 되겠어? 괜찮아^^"

주리는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연극을 하며 장애 아이들과 만나는 교사입니다. 주리의 동생 역시 장애가 있어서 장애인에 대한 다른 시선은 없다고 평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쿨하게 오케이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소개팅하는 날이 가까워 오자 이유 없는 두려움 같은 게 살짝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뭐 사랑을 눈으로 하나~. 약속했으니 나가야지."

그때, 다시 전화가 옵니다.

"주리야, 내일 소개팅할 사람이 시작장애인이 아니라 지체장애인이래"

"지체장애인?"

"응 한쪽 팔이 없는..."

주리는 친구의 말을 듣자 조금 전까지 지체장애 아이들과 즐겁게 수업하며 그들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얘들아, 얼마든지 비장애인과 똑같이 일하고, 사랑하고, 결혼해서 살 수 있어. 장애가 너희들 인생에 장애물이 되지 않으려면 너희 스스로 다르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던 주리는 막상 지체장애인과 소개팅을 해야 한다는 현실을 만나자 가슴이 먹먹하고 무거워지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연애, 결혼을 지켜보며 대단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지만 내가 그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나가고 싶지 않은 것도 솔직한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리는 부끄럽게 널브러진 생각들을 접고 그를 만나기 위해 거울 앞에서 긴 시간을 보냅니다.

나가려고 준비를 하다 보니 첫 소개팅의 설렘으로 마음이 두근거렸습니다.

"어떤 사람일까..."

약속 장소에 조금 일찍 도착한 주리는 자리를 잡고 그를 기다립니다,

5분 전...

정각...

10분...

20분...

"뭐야 이 사람"

주리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합니다.

"매너 없게 소개팅에 늦게 나오는 이 사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투덜거리는 마음이 표정에도 묻어 나왔습니다.

대전에서 차를 가지고 온 항승은 강남 약속 장소 주변에 주차공간을 찾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매다 40분이나 늦게 나타납니다.

주리 앞에 서 있는 항승은 어제 전화로 전해 들은 대로 오른팔이 없었습니다. 귀여운 외모에 듬직하고 순박한 항승의 첫인상이 싫지만은 않았던 주리는 늦은 이유를 뒤늦게 이해하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주선해준 친구들과 식사를 마치고 장소를 카페로 옮겨 조금 더 깊은 둘만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항승과 주리. ⓒ최선영

"4살 때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장애인이 된 이유를 말하다 말고 항승은 갑자기 오른쪽 바지를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있어야 할 다리가 없었습니다. 다리 대신 아주 단단해 보이는 철봉과 검은 발이 있었습니다.

주리와 항승 사이에 잠깐의 정적이 흘렀습니다.

"한쪽 팔이 없다고만 했는데..."

주리는 예상하지 못한 의족을 보고 또 한 번 놀랐지만 그 마음은 잠깐이었습니다. 대화를 이어가면서 항승이 담아내는 생각, 가치관, 믿음, 목표, 삶의 방식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주리는 모험을 즐기고, 여행을 좋아하며, 배낭 하나 달랑 들고 유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자유로운 여자였는데 항승 역시 그런 남자였습니다.

항승의 내면이 마음에 들었는데 공통분모까지 찾게 되자 그가 더 좋은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다혈질 기질이 있는 주리와 달리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항승에게 마음을 연 주리의 머릿속에는 이미 그와 연애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전과 서울. 어떻게 장거리 연애를 하지?"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항승은 전화번호도 묻지 않고 주리를 보내려 했습니다.

"인연이면 또 만나게 되겠죠"

주리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뭐야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거야? 헐~. 나 지금 까인 거야?."

주리는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항승 역시 주리를 처음 본 순간 마음에 담고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흔한 밀당 한번 못해보고 주리는 "나만 이런 감정인 거야?"라며 주선해준 친구에게 속상한 마음을 털어냈습니다.

처음이라 어떻게 하는지 몰랐다며 뒤늦게 사과 전화를 한 항승과 장거리 연애는커녕 단거리 친구도 되지 못한 체 2년을 애매모호한 관계로 가끔 연락을 주고받고, 아주 뜸하게 얼굴을 보며 지냈습니다.

제주도 여행.

비슷한 시기에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안 주리는 항승과 함께 비행기를 타면 할인된 가격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유로 들면서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합니다.

그 여행에서 주리는 이것저것 챙겨주며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주는 든든한 항승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사랑스러웠습니다.

마치 오래된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난 것 같은 편안함. 항승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 놓치고 싶지 않다..."

주리는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항승은 여전히 그대로 그 자리입니다.

항승의 의족. ⓒ최선영

둘째 날 밤. 주리는 항승이 의족을 뺀 다리를 보았습니다. 의족을 뺀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에 주리의 마음이 떨렸습니다. 어쩌면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그의 장애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주리는 항승이 의족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냥 주리와 똑같은 비장애인처럼 생활할 수 있는 친구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가 의족을 빼내자 그의 오른쪽 다리는 무릎 바로 아래에서 잘려있었습니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의 팔은 그전에도 눈으로 볼 수 있었기에 별로 상관이 없었지만, 다리는 달랐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 살짝 보긴 했지만 그 이후 잊어버리고 싶어 생각에 담아두지 않았습니다.

한쪽 다리가 없다는 것.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주리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훨씬 큰 불편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징그럽지 않아?"

주리는 한참 동안이나 할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해야 항승 씨가 상처받지 않을까, 아니, 상처를 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처가 아닐까?"

침묵을 깨고 항승이 자기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사고를 당하게 된 상황, 병원생활, 가족들의 이야기, 대안학교생활 등..

그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주리는 손끝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4살의 아이가 교통사고로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하지만 항승의 표정과 말투, 그의 담담한 분위기는 마치 "난 이제 괜찮아. 아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항승과 주리의 이야기는 새벽 5시까지 이어졌고, 주리는 마치 1000피스의 퍼즐을 두 손에 가득 담아 들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걸 다 맞추고 나면 결론이 날 것 같은데 도저히 맞출 엄두가 나질 않는다. 용기가 없는 것일까... 그의 장애를 다 감싸 안을 용기는 없지만...,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시간이 좀 더 지나고 주리는 그를 다 감싸 안으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만큼 어이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연인이 되면 마치 항승의 활동보조인이라도 돼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는 것처럼. 그때, 주리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도움이 필요한 쪽은 주리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젊은 청춘 남녀가 단둘이 떠난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그들의 제주여행은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체,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제주여행 이후 늘 그 자리에 있던 항승이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 그의 숨결, 그의 몸짓...

정장에 어울리지 않는 배낭에서 항승은 꽃다발을 꺼냅니다.

그리고 주리가 기다리던 사랑고백을 합니다.

주리에게 꽃을 건네며 사랑고백 하는 항승. ⓒ최선영

"난 너를 좀 더 알고 싶고 너와 많은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어. 너의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예상 못했던 말도 아닌데... 주리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황한 주리의 표정을 항승도 읽었습니다.

주리의 감정을 토닥여주기 위해 항승은 계속 마음을 썼습니다.

"주리야. 내가 이렇게 너에게 나의 마음을 전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넌 절대 모를 거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네가 좋았어.

하지만 쉽게 말할 수 없었어. 내가 생각했을 때 넌 너무 대단한 여자고, 난 너무 부족한 남자거든. 장애도 있고. 직업도 안정적이지 않고. 돈도 별로 없고. 너에 비해 부족한 것들만 계속 생각났어.

내가 너를 좋아해서는 안되는 이유들만 계속 떠올랐지. 그러면서 나의 감정을 숨겼던 것 같아. 하지만 여행이 주는 시간 속에, 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안되는 이유들을 하나둘씩 버릴 수 있게 됐어.

지금도 난 여전히 부족해. 여전히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어. 하지만 너는 나의 그런 점들을 버릴 수 있게 해줬어. 진심으로. 너와 함께 있으면 난 계속 힘이 생겨.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너는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항승의 마음을, 진심을 알기에 주리는 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다가옴을 기다렸는데 왜 그를 밀어내려 하는지 주리 자신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착하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잘 알기에 어쩌면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항승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항승도 주리가 왜 선뜻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알기에 주리가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주절거릴 때마다 논리적인 답을 주며 거절하는 이유들을 하나씩 지워나갔습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봐"

고민하는 주리에게 친구가 들려준 말.

주리의 마음은 항승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따라가려고 할 때마다 현실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며칠이 지나고 항승과 만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저 바라만 보던 항승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대답해줄래? 나와 함께 할 마음이 정해졌다면 내 손을 잡아줘"

주리는 머뭇거리고 망설이기를 반복했습니다.

그 손을 잡고 나면 주리가 감당해야 할 현실이 너무 커 보였습니다.

"난 여전히 나를 먼저 생각하는 이기적인 여자야..."

주리는 자신의 그런 모습이 항승으로 인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난 스노보드 타는 걸 좋아해. 나랑 만나려면 스노보드를 타야 해."

"배울게. 너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스노보드 나도 탈게."

항승의 손을 잡은 주리. ⓒ최선영

주리는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항승의 손을 잡았습니다.

오른손이 해야 할 일까지 왼손이 하느라 그 손은 거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은 듬직하고 아주 많이 따뜻했습니다.

주리는 항승에게 스노보드를 가르쳐주었습니다. 항승은 주리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스노보드를 꼭 배우고 싶은 마음에 새하얀 눈 위로 주리의 손을 잡고 나갑니다.

그 걸음이 2018평창패럴림픽으로 향하는 첫걸음인 줄 모른 체.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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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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