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을 받고 있는 하연. ⓒ최선영

눈부시게 내리는 햇살마저도 싸늘하게 느껴지는 계절. 그 계절의 시작과 함께 유재희 그가 정하연 그녀의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어서 오세요”

“아메리카노 주세요”

아메리카노 한 잔, 두 잔, 세 잔....,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재희는 노트북을 펼쳐놓고 몇 시간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일에 빠져있습니다.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커피만 마시며 일하는 저 사람은 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주말마다 같은 자리, 같은 시간, 같은 모습으로 일에 열중하던 재희가 하연의 존재를 본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습니다.

“샌드위치 하나 모카 라떼 한잔 주세요“

고개를 숙이고 폰을 보며 주문하는 재연의 입모양을 보지 못해 하연이 주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주문을 제대로 받지 못한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

“저 죄송한데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재희는 하연의 조금은 어색한 말투에 고개를 들고 하연을 잠시 바라보다, 청각장애 바리스타 배지를 보고 살짝 미소를 건네며 천천히 다시 주문합니다.

두 달을 아메리카노만 먹던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샌드위치에 모카 라떼를 주문했던 날입니다. 그날 이후 재희는 다시 아메리카노만 주문합니다.

하연의 휴무.

“난 오늘 꼭 바다 볼 거야”

“추운 날씨에 바다 보러 가지는 사람들 이해가 안 간다 정말”

바다가 보고 싶다는 하연에게 언니 소연은 투덜거리면서도 함께 바다를 보러 갈 준비를 합니다.

바닷가에서 웃고 있는 하연. ⓒ최선영

바람마저 심하게 부는 날씨는 옷깃을 더 여미게 만듭니다.

“거봐 춥다고 오지 말자고 했잖아”

소연은 하연을 보며 또 투덜거립니다.

“그래도 좋잖아... 아무도 찾지 않을 때 오면 더 반가워해주잖아”

하연은 찬바람에 두 볼이 빨갛게 얼어붙으면서도 총총걸음으로 좋아합니다.

“언니 우리 뛰자”

춥다며 동동거리는 소연의 손을 잡아끌며 하연은 달음질을 합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저만치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다를 왜 저렇게 열심히 찍고 있는 거지?”

소연은, 혼잣말을 하고는 그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하연의 등을 툭~칩니다.

“하연아 가자”

“으... 응”

하연은 몇 발자국 옮기다 돌아보기를 반복하더니 걸음을 멈추고 언니를 쳐다봅니다.

“왜?”

“언니 나 저 사람한테 잠깐 갔다 올게”

“아니 왜? 이런 곳에서 낯선 사람이랑 엮이면 안 돼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낯선 사람 아니야 우리 가게 손님인 것 같아”

하연은 잠시만 다녀온다며 다시 그를 향해 달려갑니다. 하연이 본 그 사람은 재희였습니다. 재희는 작가였습니다.

아직 유명 작가는 아니지만 여행 관련 서적을 한 권 출판하고, 지금은 드라마 대본을 쓰고 있다고 합니다.

평일에는 배경이 될 장소를 둘러보고, 인터뷰하러 다니기도 하는데, 주말에는 하연이 있는 그곳을 찾아 글을 쓴다고 합니다.

재희의 집과는 거리가 좀 있는 충무로 역점을 찾는 이유는 붉은 컬러감, 넓은 공간, 스포트라이트를 연상하게 하는 조명 그리고, 벽에 전시되어 있는 등록문화재 영화 사진들이 좋아서입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재회와 하연. ⓒ최선영

“하루 종일 식사도 하지 않고 아메리카노만 마시며 일하는 것 같아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그랬어요”

하연은 평소 궁금했던 것을 물어봅니다.

“일할 때는 아메리카노가 제 밥이에요, 일하지 않을 때는 샌드위치도 먹고 라떼도 마시고 그래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재희가 말합니다.

딱 한 번 말고는 늘 일하러 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연은 재희의 열정이 담겨 있는 글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겨울바다에 그들의 따뜻한 미소를 남기고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그날 이후 재희의 방문이 평일에도 이어졌습니다.

예고 없이 그곳을 찾는 재희의 걸음은 그를 담은 하연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장애인이 만든 커피가 맛이 있겠느냐는 고객의 편견을 깨기 위해 애쓴 선배들의 노력 때문에 지금은 장애인 바리스타에 대한 편견이 많이 없는 편입니다.

그런 선배들의 노력을 이어가기 위해 하연은 커피 관련 책을 열심히 보고 일이 끝나고도 구화와 발성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하연. ⓒ최선영

재희는 하연의 그런 모습이 예뻐 보였습니다.

하연이 내린 커피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깊은 맛이라고 말하며 재희는 하연에게 깊은 사랑을 느낍니다.

언젠가 꼭 하연을 모델로 한 드라마 대본을 쓰겠다며 하연을 응원해주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차가운 겨울에 온기를 더해주었고 꽃과 함께 활짝 핀 그들의 사랑은 봄을 지나고 여름을 지나 선선한 가을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첫눈을 밟으며 사랑을 소복이 쌓아갔습니다. 나고 돌아서면 금세 또 보고 싶어지는 두 사람.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은 게 사랑인 것 같아... 혹시라도 보고 싶어서 죽을까 봐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게 결혼이고“

재희는 하연의 손에 반지를 건네며 말합니다.

“아직 부모님 모르시잖아요...”

허락을 받아오겠다며 당당하게 말하던 재희는 하연 앞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누구를 선택하든 인정해주실 줄 알았던 부모님은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허락받고 인사하러 가자던 재희가 며칠째 소식이 없자 하연은 재희를 힘들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재희에게 먼저 연락을 합니다.

재희에게 이별을 말하는 하연. ⓒ최선영

“우리 사랑은 여기까지 인가 봐요... 전 반대하는 만남을 계속 이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서로 가야 할 길이 다르다면 돌아서야겠죠..."

“아니 절대 헤어질 수 없어. 헤어질 거면 시작도 하지 않았어. 난 너 없이는 못 살아.”

“아니 살 수 있어요. 우리가 함께 한 시간에 나눈 모든 추억이 그립고 또, 그리울 때마다 아프겠지만 시간이라는 약이 우리를 위로해주고 서로에 대한 감정을 다독여줄 거예요."

“넌 그렇게 쉽게 포기가 돼? 너 없는 며칠 동안 내가 깨달은 건, 너 없이는 절대 안 된다는 거야.”

사랑으로 함께 할 때의 행복 그 이상의 고통이 이별의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을 그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두 살 때 열병으로 청각을 잃은 하연을 안고 가슴 아파했을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또 가슴 아파하실 텐데... 하연은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행복했던 만큼 아파하며 긴 시간 이별을 위해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습니다. 리고 또다시 찾아온 가을의 시작과 함께 그들은 그 긴 이별연습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2년 후

시간의 흐름 속에 하연이 말한 것처럼 서로에 대한 감정이 무뎌지고 바래진 줄 알았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그에 대한 기억을 가두어 버리고 아무도 꺼내보지 못하도록 숨겨놓았다고 생각했는데...,그와 함께 했던 그 겨울의 그 바다는 그녀의 모든 시간을 되돌려 놓았습니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 떨어지는 햇살의 반짝임이 그에 대한 그리움을 불러오고 그녀의 온 마음을 적셔옵니다.

“하연아...”

그녀의 심장을 내려앉게 하는 그의 목소리. 연은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습니다.

“내가 잘 못 들은 걸 거야”

“하연아...”

그녀를 부르는 재희의 목소리는 그녀의 앞으로 돌아 나옵니다. 년이라는 시간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시간의 공백 없이 그들은 2년 전으로 다시 돌아가 버립니다.

“여기 오면 널 만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래서 2년 동안 널 이곳에서 기다렸어,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너를 내 마음에 담았던 이곳에서..., 우리가 이별한 이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어.”

“우린 돌아갈 수 없어요.”

“아니 이미 우린 돌아왔어. 매일 널 지켜봤어. 커피를 내리는 네 손. 웃고 있지만 울고 있는 너의 미소... 여전히 나를 그리워하는 네 마음까지도... 이제 부모님 마음도 많이 열리셨어.

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뭐든 잘 해내잖아 나를 위해 그래주면 안 되겠니? 쉬운 이별을 택하지 말고 어려운 사랑을 나를 위해 선택해주면 좋겠어."

늘 재희보다 조금 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하연은 이 순간 하연을 향한 재희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재희의 깊은 사랑을 이제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사랑을 그리움이라는 슬픔에 묻어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시 만난 재희와 하연. ⓒ최선영

이별을 위해 1년을 힘겹게 보내고, 이별 후 2년을 죽을 만큼 아파하며 지낸 그들은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선택하는 혼자가 되는 이별 대신, 함께 하는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사랑을 지키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움을 참는 것만큼 힘들지는 않다는 것을 하연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

조금 있으면 점장 시험이 있는 하연이는 점장이 꼭 되고 싶습니다.

장애인 1호 점장이 되려고 노력하는 많은 사람 중의 하나인 청각장애 바리스타 하연이 이제,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일도 사랑도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으로 행복만 가득하기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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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칼럼리스트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졸업 후 디자인회사에서 근무하다 미술학원을 운영하였다. 현재는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며 핸드메이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동화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한 언어로 담아 내려고한다. 동화를 통해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를 이해하는 시선의 폭이 넓어져 보이지 않는 편견의 문턱이 낮아지고 서로 배려하고 이해하는 어우러짐의 작은 역할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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