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 여행을 준비하다가 떠나기 바로 전날 구글 지도에서 두 개의 대학이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 하나가 갤로뎃 대학교(Gallaudet university)였는데 청각장애인을 위해 세워진 유일한 대학이라는 보충설명을 읽고 반가운 마음에 방문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최대의 난관이 있었다. 나는 영어 수어는 물론 한국어 수어도 전혀 할 줄 모른다. 인터넷 검색결과 갤로뎃 대학교의 임직원들은 구어를 구사할 줄 알아도 수어를 우선적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워싱턴까지 가서 그 대학을 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최소한 건물의 디자인만이라도 구경하자. 얼굴에 최대한 미소를 짓자. 안 되면 몸으로 말하자. 정 안 되면 글이라도 적어서 소통하자는 결연한 의지로 교정에 들어섰다.

정문에 들어서자마자 안내하는 분이 말을 걸어왔다. 역시나 수어였다. 나는 민망한 얼굴로 큰 소리로 천천히 구어로 대답했다. "저는 방문객입니다!" 다행히 그분은 친절하게도 어눌한 말투로 구어로 학생센터의 위치를 가르쳐주었다. 가이드도 없었던 터라 그가 알려준 핵심정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학생센터에 들어갔는데 실내가 조용했다. ‘금요일 오후라서 다들 일찍 집에 갔나?’ 하는 생각이 스침과 동시에, ‘헉!’ 수어로 대화하는 많은 학생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장난 끼가 가득한 영락없는 젊은이들이었다. 센터 내에는 우체국도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는데 한 줄로 서서 대기하고 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기념품 샵에 들어갔는데 수어로 열렬하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보였고, 점원도 수어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합니다’를 뜻하는 수어 모양의 배지를 골라서 현금카드를 냈다. 내가 수어를 못한다는 것이 티가 났는지 점원은 웃으며 조용히 계산해주었다.

택시 정류장과 택시들이 보였다. 대여용 자전거들도 보였다. 계단 옆에 설치된 경사로들도 보였다. 청각장애인들을 위한 다양한 배려들이 보물찾기처럼 숨어있는 것 같았다. ‘더 많이 알았더라면 더 많이 보였을 텐데’ 아쉬웠다. 출입문들은 거의 유리로 된 자동문이었는데 노크하는 소리를 들을 수 없을 경우를 고려해 이렇게 설계한 것 같았다. 듣던대로 건물에서 유리사용이 많았다. 건물들은 주로 둥그스름한 곡선의 구조를 띄고 있었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90도로 확 꺾이는 급경사의 코너는 마주 걸어오는 사람들끼리 놀라거나 충돌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었다.

태양이 심하게 내리 쬐어서 잠시 피하려고 예술학과 건물에 들어갔다. 사방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화들이 쭉 전시되어 있었다. 약간 으스스했다. 실내의 조명은 어두웠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야. 그래도 누가 있겠지’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정말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순간 건물에 혼자만 있다고 생각하니까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소리를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리를 듣지 못한다는 것은 늘 이런 두려움과 공존하며 사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의 삶에 관해 연재하는 어느 웹툰 작가가 말하기를 소리를 듣지 못하면 오히려 두려움이 덜하다고 소개했다.

우리가 치과를 가기 싫어하는 것도 기계음이 주는 공포의 영향이 크고, 밤길을 무서워하는 것도 거기서 들리는 누군가의 발소리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소리가 우리 뇌에 두려움을 준다는 것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점에 따라 장애를 수용하는 방식이 달라지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걸어가다가 교수로 보이는 한 분과 마주쳤는데 본의 아니게 인사성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헬로우! 라고 구어를 해도 되는데 수어로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청각장애인들은 이러한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이 대학교에서는 내가 역으로 장애를 경험하고 있었다.

교수들의 연구동에 들어섰는데 연구실 문들이 모두 활짝 열려있었다. 보통 교수들은 문을 닫아놓고 학생이 정중히 노크를 하면 근엄한 목소리로, “들어오세요.” 라고 한다. 그것에 비하면 교수와 제자간의 수평적인 느낌이 들어서 이런 점은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이 궁금했다. 화장실은 똑같았다. 미국은 성범죄 예방을 위해 문짝의 아래 부분이 뚫려있다. 즉 사용자의 발이 보인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장치가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학은 자체만으로 내게 청각장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끌었다.

대학을 탐방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건물이 아니라 학생들의 밝은 얼굴이었다. 벤치에 마주앉아 수어로 대화를 나누는 연인으로 보이는 대학생들, 운동장에서 미식축구를 하고 있는 선수학생들, 깔깔대는 학생들, 아시안 학생들도 제법 눈에 띄었는데 우리나라 학생인가 싶어서 반가움에 유심히 바라보기도 했다.

누군가는 갤로뎃 대학으로 유학을 꿈꾸고 있을지 모른다. 꿈을 꾸고 있다면 발걸음을 옮겨서 배우고, 생각하고, 느껴보기를 권한다. 이 대학의 어느 교수는 구어를 전혀 배운 적이 없으며, 수어만으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물론 영어 수어도 배워야 하고, 미국 현지생활에도 적응해야하겠지만 그만큼 깨닫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내가 제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추측한 것일까라는 민망함과 걱정스러움이 조금 있다. 그래도 애정을 가지고 배우고 알아가는 중이니 배려해주시리라 믿는다. 워싱턴은 개인적으로 내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서울의 광화문 같았다. 높은 빌딩,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 겔로뎃 탐방 덕분에 목적이 이끄는 여정이 되어 워싱턴까지 공을 들여 떠난 것에 대한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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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혜 칼럼리스트 이화여대에서 학생들에게 진정한 쉼은 무엇인지, 자유시간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은 무엇인지를 가르쳤으며, 현재는 미국 센트럴 미시간 대학교(Central Michigan University)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장애인의 여가를 활발히 연구하고 있다. 칼럼을 통해서는 여가와 행복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제공하고, 미국의 현장감 있는 소식을 전달할 예정이다. 장애인의 삶에 대한 관심은 열정과 패기로 가득했던 20대 청년시절의 첫 직장, 대한장애인체육회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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