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간의 달콤 살벌한(?) 추석연휴가 시작되었다. 친정과 시댁 모두 서울권인 우리 집은, 먼 귀성길에 올라 이 기나긴 연휴 중의 일부라도 소진할 수 있는 옵션이 없다.

로또 같이 긴 연휴에 ‘신난다!’를 외치며 어디 멀리 해외여행이라도 떠나 볼까도 했지만, 내게 10월 중순 내에 처리해야 하는 시간의 압박이 있는 일이 있어 그것도 불가능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우리는 열흘간의 연휴 계획을, 연휴 시작 한 달도 훨씬 더 전부터 철저하게 짰다.

아이 키우는 부모들은 안다. 남들 다 쉴 때 어디라도 떠나 보려면 얼마나 부지런해야 하는지를… 깜빡 정신 줄 놓고 있다가는 교통편도 숙박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와 직업체험 테마파크도 가고, 야구장 갈 계획도 두 번이나 잡고, 키는 쑥쑥 크는데 몸무게가 늘지 않는 아들을 위한 대대적인 의류 쇼핑도 했으며, 친정과 시댁도 방문했다.

마지막으로, 연휴의 대미는, 전곡리 선사박물관도 둘러보고, 한탄강 오토캠핑장에서 캠핑으로 마무리 했다.

헉헉헉헉!

정말 즐거웠지만, 길고도 힘든, 말 그대로 달콤 살벌한 연휴였다.

연휴가 끝나고 이제 각자의 일로 돌아간 엄마 아빠.

남편은 3일 동안 새벽 기차로 대전 통계교육원으로 출퇴근을 해야 함에도, 내가 싸 준 샌드위치를 먹으며 오랜만에 혼자만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 역시, 컴퓨터 앞에 앉아 하얀 워드프로세서 화면을 보며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이 새삼 소중하고 편안하다.

이번 칼럼에서는, 달콤 살벌했던 연휴에 갔던 야구장 나들이에 대해 이야기 해 볼까 한다.

시각장애엄마의 비시각적 야구 관전기라고 할 수 있겠다.

지난 10월 3일, 땡볕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KT Wiz'가 홈팀으로 있는 수원야구장에 다녀왔다. ⓒ은진슬

지난 10월 3일, 어마어마한 땡볕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족은 기차를 타고 수원에 가서 기아 대 KT의 야구경기를 관람했다.

벌써 두 번째 수원구장 방문이다. 일곱 살 아들이 올 여름부터 야구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야구경기도 네 번이나 관람하고, 야구 규칙을 쉽게 알려주기 위해 야구 보드게임도 함께 하고 있다. 뭐든 자기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직접 해 보고 싶어하는 아들.

운동신경도 탁월한 아들이 너무 야구를 배우고 싶어하여 배울 곳을 수소문 해 보았지만, 7세 아이에게는 아직 리틀야구단도 참여가 안되어, 어렵게 어렵게 어설픈 백인천야구교실에서 겨우 맛보기를 하고 있다. FC서울 축구단처럼 유아에서부터 체계화되고 세분화되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유소년 프로그램이 아쉽기만 하다.

사실,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야구의 야자도 모르고 살아왔으며, 당연히 규칙도 거의 몰랐다. 하지만,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 아이가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니, 아들과 함께 배우고 있는 것이다.

3세 때부터의 아들의 관심은, 약 1년 6개월 주기로, 공룡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와 수도로, 한국사를 거쳐, 이제는 야구로 변화 중이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어찌 내가 데이노니쿠스라는 공룡을, 스리랑카의 수도가 스리자야와르데네프라코테라는 걸, 삼국유사 속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아들과 즐겁게 놀며 소통하고 싶어서, 이번에는 야구를 열공 중이다.

하지만, 시각장애인으로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본다는 건, 응원의 분위기를 맛보고, 점수가 났을 때 사람들의 환희를 관찰하며, 각 구장의 이채로운 먹거리를 맛보는 것 외의 즐거움을 찾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상황 파악이 어려워 스마트폰으로 체크해야 하고, 오히려 아들이 이제 규칙과 상황판단에 익숙해져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지경이다.

시각장애인 입장에서 야구장에 갔을 때,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극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비시각적 즐거움은, 각 구장의 연고지 특색에 따라 판매되는 지역 먹거리를 맛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물론, 내가 요리도 좋아하고, 식도락가 기질이 강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각 야구 구장에는 유명한 지역명물 먹거리가 있다. KT위즈파크에는 진미통닭과 보영만두가 있다. ⓒ은진슬

KT위즈파크의 유명한 지역명물 먹거리는 진미통닭과 보영만두.(우리는 둘 다 먹어봤는데...)

진미통닭은 달콤하고 톡 쏘는 겨자소스가 매력적이었다는 것 외에 바삭한 옛날통닭을 아는 나이의 사람이라면, 하나같이 열광적인 반응 일색의 포스팅처럼 그렇게 엄청난 별미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맛있는 건 사실이다.

아무래도, 요즘 치킨들이 맛의 본질을 추구하기 보다는 너무 다양하고 화려한 소스 옷을 입고 있어서, 오히려 사람들이 이런 담백하고 바삭바삭한 옛날 통닭에 열광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번에는, 보영만두와 매운쫄면을 시도했다. 만두는 돼지고기 속이 아주 꽉 찬 고급진 야끼만두의 맛으로 제법 맛있었고, 쫄면도 보통의 천편일률적인 소스가 아니어서 맛이 있었다.

지나치게 시지도 않고 지나치게 달지도 않고, 맥주를 마실 요량으로, 우리는 매운 맛의 쫄면을 선택했는데, 매운 맛이 보통 매운 게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매워서, 다음엔 보통 맛을 시킬 예정이다. 고춧가루가 베트남고춧가루 같았는데, 그 때문인 것 같다.

만두랑 쫄면을 같이 먹어도 매우 잘 어울리는 조화로운 맛.

수원의 명물, 진미통닭 대 보영만두의 대결의 승자는?

보영만두 판정승!

이번에는, 청각적 공감이 가능한 응원에 대해 한 번 살펴보자. 케이티가 최근에 생긴 팀이어서인지, 응원가나 음악들이 내 취향에 가장 가깝고 세련되었다. 응원 리드하는 아저씨도 매우 열정적으로 끊임없이 잘 해 주신다.

한 가지 이채로웠던 건, 구장 내 아나운서였다. 보통, 야구장 아나운서는 남자가 대부분이라던데, 이곳은 목소리에 파워와 흥이 한껏 담긴 메조소프라노에서 알토 사이의 목소리를 가진 멋진 여성이 힘 있고 멋진 아나운싱을 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아들도 누나의 목소리와 억양이 기억에 남는지, 맨날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며, ‘내야수 오태곤’, ‘KT의 로하스’를 누나 스타일로 외쳐대고 있다.

아들이 사랑하여, 언젠가는 꼭 사직구장에 가서 야구를 보고야 말겠다고 벼르고 있는 롯데! 지역 연고도 없는데, 왜 좋아하느냐 물으니, 자기가 좋아하는 롯데제과에서 맛있는 과자도 많이 만들고, 롯데월드와 서울스카이도 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단다.

그야말로, 아이다운 참신한 이유에 신선했다. 롯데는 응원석과 매우 멀리 있었는데도 함께 응원에 참여하고 동화될 수 있을 정도로 혼신의 응원을 하는 듯하다.

롯데응원에서 이채로웠던 점은, 경기 중간에 비닐봉투를 주시기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고 잘 정리해서 떠나라는 건가보다고 말했더니, 남편이 웃으면서 머리에 쓰고 응원하는 응원도구란다.

와! 아이디어 참 좋다. 전통이 깃든 오래 된 응원방식이라고 하던데, 덤으로 쓰레기도 잘 담아 정리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기아는 응원석과 훨씬 가까운 위치에서 관람했음에도 응원단장이 리딩을 잘 못했고, 그저 각개전투에 의존한다는 느낌이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관중들의 개인적 감정이입의 정도가 높아, 선수가 실수하거나 좀 못했을 때 야유 섞인 반응도 좀 심하여 아이와 응원하며 관전하면서 압박감이 제법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난 롯데전보다 응원석에 좀 더 가까운 좌석에 앉아서 이런 느낌이 더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홈팀이 아니면, 이벤트도 없고, 자리도 서럽다.

너무 더운 직사광선 아래서 상황판단도 안 되는 야구를 보려니 열사병에 걸릴 지경이었으나, 아들은 정말 초집중하며 잘도 보았다.

나는 타 죽거나 오버쿡 되지 않기 위해 몇 번이나 공수교대 때 들락거려야 했다. 지난 번 롯데 경기도, 이번 기아 경기도 원정팀들을 응원하러 간 입장이었던 탓에, 롯데와 기아가 이겨서, 아직 승패에 민감한 일곱 살 아이를 데려갔기에 좋았지만...

홈팀인 KT에게는 좀 미안했다. 그래도 이틀 전에 기아를 20대 2로 이겼다니 괜찮겠지라고 생각했다.

한창 야구에 빠져있는 아들, 내년 여름쯤이면 아들 덕에 야구 매니아가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은진슬

재미있게 관전을 마치고 버스를 타러 가는 길.

우리 앞을 걸어가던 이응이 또래 여자아이와 같이 걷던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너 숙제 안 하면 저녁밥 안 준다.'

이 말을 들은 우리 아들이 버럭 하며 말했다.

'밥 굶으면 죽어. 사람을 저렇게 동물처럼 대하면. 안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말을 들은 남편 왈,

'너 우리 엄마는 억지로 공부도 안 시키고 밥도 안 굶기고... 엄청 착한 엄마야!.'

'그래, 엄마도 이응이 말이 맞다고 생각해. 하물며, 동물이라도 굶기고 학대하면 안되는 거고.'

여섯 살 때 유치원을 통해 우연히 받게 된 웩슬러 언어섹션 검사에서, 아들은 딱 한 개를 틀렸던 터라, 아들 언어 지능이 남자아이 치고는 제법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너무도 적확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아들의 말에, 아들과 언어적 논쟁을 하려면 늘 공정하고 논리적인 견고함을 장착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새삼 해 보았다.

앞으로도 내가 엄마라고, 어른이라고 행여라도 존중하지 않고 조심성 없이 대했다가는 본전도 못 찾겠다는 생각이 새삼 폴폴 솟아났다.

쓰다 보니 야구문외한 시각장애아줌마의 이상한 관람기 같이 되어 버렸다.

엄마노릇 참 쉽지 않다.

내년 여름쯤이면 나도 야구매니아가 되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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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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