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다섯 살이 되어 유치원에 입학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몇 달 후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아이가 일곱 살 가을쯤이 되면, 마냥 행복하고 건강하고 즐겁게 놀며 자라기만을 바란다던 나 같은 엄마들조차도, 초등입학을 앞둔 아이에게 어느 정도의 수학능력(?)을 갖추어 주어야 하는지 살금살금 고민을 시작한다.

그렇게 고민하면서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보니, 한글과 수학 학습지 두 개는 기본에, 미술, 태권도, 피아노 등의 예체능 학원 중 하나 정도는 필수다.

이응이도 6세 10월쯤 본인이 강력하게 원해서 태권도를 시작하여, 근 1년째 즐겁게 다니고 있는데, 이것이 우리 아이가 받고 있는 유일한 사교육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특별한 사교육 없이도, 스스로 한글을 깨치고 간단한 셈을 하며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로 잘 자라 주었기에 우리 부부는 특별히 조급해 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우리가 사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런 지적 자극도 주지 않고 아이를 방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매일 상당히 많은 책을 읽어주었고, 틈나는 대로 아이의 지적 관심을 따라 카드게임, 각종 보드게임 등을 하며 열심히 놀았다.)

하지만, 여름방학 무렵, 아이는 처음으로 자기도 학습지라는 걸 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자기도 주변 친구들을 보니 안 하는 친구가 없고, 확실히 이것저것 많이 배우는 친구가 영어 알파벳도 읽고 하는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던 모양이었다.

우리 부부는 아직은 아이에게 사교육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이가 막상 요구를 하고 보니, 부모의 교육철학이라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학습지는 아직 안 해도 된다고 할 일만은 아닌 것 같았다.

일곱 살이면 자기가 무얼 하고 싶은지, 왜 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판단하고 표현할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민 끝에, 남편과 나는 아이에게 학습지를 했을 때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알려주고는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로 하였다.

참 다양하고 많은 학습지들. ⓒ맘앤앙팡 design.co.kr

한국에는 어찌 그리 많은 학습지들이 있는지…

이 많은 것들 중에 내 아이에게 적합한 스타일을 찾는 데에도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겨우 학습지 하나를 정해 체험수업을 요청했는데…

Oh, my God!

체험수업을 10시경에 오시겠단다. 당연히 오전 아니고 밤 10시 말이다.

학습지를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고, 만약 체험 수업 후에 학습지를 하기로 결정해도 할 수 있는 시간 역시 빨라야 8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란다.

학습지 교사는 학습지 하는 아이들이 워낙 많고, 이 주변 아파트 몇 천 세대가 자신의 필드이다 보니, 시간 조정 같은 걸 해주려는 시도조차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았고, 할 테면 하고 말 테면 말라는 태도였다. 더욱이, 수업 시간이 매주 그렇게 늦게 잡히면 아이 수면시간이 늦어진다는 문제로 난처해하는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여기는 듯도 했다.

솔직히, 남편과 나는 충격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 집에서 일곱 살 아이의 저녁 8시 30분이란, 내일을 준비하며 목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이 이 시간에 학습지 선생님을 만나 수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 부부에게는 너무 낯선 현실로 여겨졌던 것이다.

물론, 부모의 직장 문제로 퇴근이 늦어지는 아이들도 있고, 저마다 사정은 다 다르니 뭐가 옳다 그르다 할 상황은 아니지만, 일곱 살 아이들이 밤 9시에도 잠을 잘 수 없다는 건 너무 가혹하다 싶었다.

나랑 통화할 때는 시간을 조정해 보겠다고 의례적으로 말하던 교사였지만, 예상대로 다시 전화가 오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아이에게 학습지를 하려면 밤늦게 밖에 시간이 없어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하고는, 공부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로 첫 번째 사교육 시도를 실패로 마무리했다.

학습지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우리 부부는 남편은 수학, 나는 영어를 맡아서 작은 학습적 자극을 제공해보기로 하였다. ⓒ은진슬

그날 이후, 우리 부부는, 아이가 무언가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는데, 어쩐지 그냥 방치해 두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 작은 학습적 자극을 제공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시각장애 부모에게 엄마표 또는 아빠표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옵션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나마, 남편의 경우에는 문자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하기에 나보다 옵션이 많긴 하지만…

남편은 얼마 전, 수학 전공자답게 서점에 가서 매의 눈으로 아이와 함께 할 만한 수학교재 하나를 골라 와서는 매일 하루에 한 두 페이지씩 5분에서 10분 정도 재미있게 같이 해 주고 있다.

나는 영어를 맡았다.

요즘 야구에 푹 빠져 있는 아들은, 그 간 집에 붙여 놓아도 전혀 관심조차 주지 않던 알파벳이 너무 궁금해졌다. 왜냐하면 프로야구팀 이름에 LG, KT, SK 등등, 영어 알파벳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참에 아이가 3, 4세 때 한참 좋아해서 집에 갖추어 두었던 책 읽어주는 나무 북트리로 읽을 수 있는 먼지 쌓인 전집을 다시 꺼내어, 하루에 한 권을 같이 읽고 노래도 듣고 첸트도 하기 시작했다.

굳이 아이가 원하지 않았기에 하지 않았는데, 당장 내게 주어진 접근 가능한 교재가 그것 밖에 없기에 학습지 하는 대신 매일 5분에서 10분 정도 함께 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기주도적이며, 스스로 납득하고 원해야만 할 수 있는 아이인데, 다행히도 이 정도는 하고자 했던 학습지 대신이라고 여겨서인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즐겁고도 재미있게 잘 따라와 주고는 있다.

드디어, 우리도 무언가 아이와 본격적인 의식적 학습이라는 걸 시작하긴 했지만, 초등준비로 이만큼은 왠지 성에 차지 않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어쩐지 뭔가 더 많은 책과 자료들을 같이 읽고 상호작용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시각장애인인 나로서는, 내가 읽고 싶은 책 하나도 점역해서 보기 어려우니, 아이 공부 시키겠다고 학습지나 아이 책을 점역할 수도 없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앞으로 아이가 점점 더 커갈수록 학습적 상호작용은 더 필요할 텐데, 책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엄마들은 어떻게 아이 공부를 함께 도와야 할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하던 중,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건 바로 초등 1학년 교과서.

시각장애초등입학생들은 점자로 된 초등1학년 교과서를 볼 것이고, 그것을 특수학교에 부탁해서 구해 볼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번에도 나의 든든한 육아선배인 시각장애 아빠이자 교사인 대학 후배에게 초등 1학년 점자 교과서를 좀 구할 수 없냐고 물어보니, 이제는 교과서 구하는 게 우리 때처럼 어렵지 않다며, 당장 카카오톡으로 웹사이트 주소를 하나 가르쳐 주었다.

시각장애 학습전문 '이앱' 사이트 메인화면 ⓒ은진슬

시각장애 학습전문 이앱사이트에 접속하여, 회원 가입을 하고 복지카드를 보내 인증을 받으면, 학부모로서 점자교과서를 받아볼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세상에 숱하게 많은 좋은 책, 멋진 교재들이 모두 화중지병인지라, 시각장애엄마로서 내가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것이 고작 이 교과서뿐이라는 게 너무나도 아쉽기는 하다. 그래도, 이걸 매일 조금씩, 조금씩 함께 읽으면서 앞으로의 초등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감도 높여 주고, 이응이도 곧 초등학생이 될거라는 자부심도 느낄 수 있게 해 주면서 즐겁게 사교육 없는 초등입학 준비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새삼 느끼지만, 시각장애맘인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앞으로도 극성엄마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아이랑 교과서나 참고서 하나 같이 읽어 주며 공부하기도 어려울테니…

뭐, 그래도 그만큼 아이를 학습적으로 닦달하고 간섭하기 어려운 환경이니, 아이가 좀 더 자율적으로 편하게 공부를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는 자기 위안을 하며 애써 긍정적인 측면을 찾아본다.

모쪼록, 아이의 초등 입학을 앞두고 나처럼 고민이 많을 시각장애맘들에게 나의 고민과 간단한 솔루션이 담긴 이 칼럼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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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슬 칼럼리스트 세상이 너무 궁금했던 나머지 7개월 만에 급하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바람에 시각장애와 평생의 불편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언어로 연주하고,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0년 정도 피아노와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첫사랑은 대게 이루어지지 않듯 그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헤매던 끝에 지금은 장애, 음악, 보조공학 등에 관련된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학교, 기업체 등에 찾아가 장애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토리텔러(storyteller) 역할도 하고 있지요. 가끔은 강의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피아노 앞에 앉기도 한답니다. 다섯 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저는 우리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서는 장애와 다름이 좀 더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글을 쓰고, 강의를 하며, 연주도 하고 있습니다. 눈이 나쁜 대신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더 예민하고, 커피와 독서,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는 다섯살 아이 엄마가 들려 드리는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아이 키우는 이야기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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